천동설이 무너진 날

by 정희

처음에는 냉동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줄 알았다. 냉동실 음식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사실은 냉장고가 고장 난 거였다.


우리 집의 중심은 우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냉장고였다. 냉장고라는 태양이 꺼지자 집안은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되었다. 고장 난 냉장고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A/S를 신청하는 수밖에.


하지만 요즘 A/S는 사람 목소리 듣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AI 상담원은 몇 번 기계적인 대답을 하더니 나를 홈페이지로 넘겨버렸다. 평소 챗GPT와 대화하며 AI 기술의 발전을 예찬하던 나지만, 이럴 때는 그 발전이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싶었다.


겨우 접속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문 일정은 일주일 뒤였다. 냉장고 없이 일주일이라니. 당장 오늘부터 어떻게 먹고살지.


호들갑을 떨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 본다. 냉장고 없는 삶이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내가 이 웅웅거리는 기계 상자에 의존해 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열 살 무렵 이후로는 집에 냉장고가 없었던 적이 없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 집 부엌에는 찬장이 있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대부분의 음식은 바로 시장에서 사서 만들어 먹었다.

여름에는 찬물에 수박이나 참외를 담가 시원하게 먹었고, 겨울에는 김칫독을 땅에 묻어 보관했다. 너무 오랫동안 냉장고라는 문명에 길들여져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다.


이제부터 일주일, 생존 모드다. 첫 번째 수칙, 냉장고 문을 최대한 열지 말 것.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냉기를 보존해야 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자 냉장고에서는 음식이 상하는 꼬릿한 냄새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온도를 확인하겠다며 온도계를 넣었다. 23.5도. 23도인 우리 집 실내보다 오히려 냉장고 안이 더 뜨거웠다. 냉기를 보존하려던 노력은 헛수고였다. 냉장고가 차갑기는커녕 열을 뿜어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냉동실의 음식은 전멸했다. 잔뜩 쟁여두었던 고기는 급하게 모두 익혀두었지만, 생선은 모조리 상해 버렸다.


썩어버린 생선을 치우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젠 냉장고의 혜택 없이, 우리의 지혜로 먹고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머니들의 생존 지혜가 소환된다. 조금이라도 차가운 부엌 베란다에 음식을 보관하고, 간장에 조려 오래 보존한다. 세균 발생을 늦추기 위해 음식을 여러 번 데우고, 상하기 전에 먹어 치우고, 그래도 안 되면 과감히 버린다.


A/S 기사님 방문까지 남은 시간은 3일. 냉장고라는 태양이 꺼졌다고 해서 우리까지 굶어 죽을 수는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냉장고가 없으면 찬장으로 버티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