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간 여유가 생겨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OST를 다시 들었다. 스토리, 미장센, 음악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영화가 또 있을까.
젊은 날, 나는 이 영화에서 오직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만을 보았다.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절제해야 했는지 그저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의 망설임 뒤에는 1960년대 홍콩이라는 시대의 제약, 이웃의 시선, 유부남과 유부녀라는 무거운 사회적 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고통이 단순히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시대가 부여한 굴레처럼 느껴져, 젊은 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애틋하다.
음악을 다시 들을 때마다 1960년대 홍콩의 축축한 공기와 장만옥의 고독한 눈빛, 그리고 치파오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장만옥의 치파오는 단순히 아름다운 의상이 아니었다. 화려한 꽃과 용 문양으로 채워진 그 옷은, 좁은 공간에 갇힌 수리첸의 감정이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유일한 출구처럼 보였다. 그토록 외로운 상황 속에서도 매번 옷을 갈아입으며 우아함을 지키려 했던 그 몸짓 자체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배우자들의 외도라는 상처를 공유하며 가까워졌지만 끝내 선을 넘지 않았던 두 사람. 좁은 복도와 비 오는 거리에서 끊임없이 맴돌기만 했던 그 미완의 사랑.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들이 선을 넘어 함께 살았다면 정말 행복했을까.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다 보면 우리들처럼 지지고 볶고 갈등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지나가는 이 가을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우리는 이 계절을 이처럼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것들은 찰나여서 아름답고, 슬프고, 행복한 것 같다.
유메지의 테마가 다시 흐른다. 첼로 선율이 맴도는 동안, 그 시절의 두 사람도 잠시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