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P와 J에 대하여: 수풀 속을 걷는 법

by 정희

‘관악산 정기 좀 받으러 가야겠다’는 딸의 말 한마디가 우리 집 'P' 유전자를 강제 소환했다.

MBTI 검사에서, 왕 'P'인 딸과 같은 'P'인 그 친구가 세운 등산 계획은 놀랍도록 투명했다. 날짜와 만나는 시간 말고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으니까.

' 관악산도 올라가는 코스가 여러 개인데, 코스라도 정했어?'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답했다. 내가 '그렇게 정한 게 없으면 갈 수 있겠니?' 물었다. '몰라. 그냥 가면서 정하면 돼'라고 했다.


딸의 등산에 왕 ‘J’인 고등학교 친구가 합류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 친구 처음부터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코스 알아보고, 시간까지 다 짜 볼게. 너희는 그냥 오기만 해.’라고 했다. 딸아이는 그 친구의 계획을 듣고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코스, 걸리는 시간, 아침에 먹을 음식, 중간 쉴 곳, 내려와서 음식 먹을 장소 예약 등 완벽한 계획이었다고 한다.


내가 물었다. 그럼 ‘그 친구는 그렇게 계획을 세우면 상황이 계획에 안 맞게 흘러가면 엄청 힘들어하겠네.’ 하자, ‘그렇지 않아. 그 친구는 사고가 엄청 유연해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않아. 그리고 계획이 어긋날 것을 대비하여, 2안, 3안까지 모두 세워 온다’는 것이었다.


딸과 나는 ‘우리와는 엄청나게 다른 사람이구나’ 하며 웃었다. 왠지 저렇게 철저한 사람들은 살면서 별로 실수를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부러웠다.


브런치 스토리에도 보면 어떤 작가는 글을 어떤 방향으로 쓰겠다고 매거진을 발행하기도 하고, 연재계획을 미리 올리기도 한다. 잘 정리된 발행 예정들을 보면, 마치 잘 닦인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보는 기분이다. 나는 매일 수풀을 헤치며 길을 내는 중인데 말이다.


나는 살면서 크게 계획을 세워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교단에서 수십 년간 지도를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길'을 일러주었지만, 정작 내 인생이라는 지도 위에서 나는 늘 경로를 이탈하는 사람이었다.


딸과 나는 웃으며 결론을 냈다. '우리는 그냥 J 옆에서 응원이나 하며 살자.'

그래도, 가끔은 그들의 계획이 부럽다.


다음에는 나도 그 ' J'인 딸의 친구처럼, 내 글의 2안과 3안을 미리 품어보는 연습을 해 볼까. 목적지를 정해두고 걷는 산책자가 보는 풍경은 늘 헤매던 수풀 속 풍경과 어떻게 다를까.


수풀을 헤치는 일이 막막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