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보이스 슬립스>
소외받는 이들을 조명하는 영화는 언제나 반갑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외받는 자들을 스크린에 담는 일은 영화의 숙명이자 역할이다. 영화만이 가장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들의 삶을 비출 수 있다. 영화란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내게 영화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내게 이민자들은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뉴스에서나 접하는 사람들이었지, 그들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감각하진 못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존재들이었다. '동현'과 '소영'의 말다툼에서, 새로운 나라 새로운 교실에서 낯가리는 어린 '동현'에게서, 오랜만에 찾아온 '동현'과 '소영'을 부정하는 시어머니에게서 나와 내 삶을 보았다. 그리고 이모가 생각났다. 이모 역시 독일인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다. 아시안 여성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모를 생각했다. 좋은 영화는 잊고 있던 내 삶의 순간을 불러온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보는 내내 영화를 본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마치 '소영'과 '동현'의 인생을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애프터썬>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저 '소피'와 '캘럼'의 인생자체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애프터썬> 모두 부모와 자식이 어디론가 떠나간다는(여행 혹은 이민) 설정이 스토리의 메인 테마다. 또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대놓고 한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았다. 그러나 <애프터썬>에서 떠나감과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떠나감은 다르다. <애프터썬>에서의 여행은 돌아오기 위한 떠나감이다. 단순히 쉼을 위한 떠나감에 가깝다. 그러나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의 떠나감은 문자 그 자체로의 떠나감, 돌아오지 않기 위한 '이민'이다. 아마도 '소영'이 떠나간 것은 남편의 자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하늘로 떠났기 때문에, '소영'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GV에서 세분이 울었다. '동현'처럼 이민자 2세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영화로 울리고 위로할 수 있다니! 그런 영화를 만든 앤서니 심 감독이 부러워졌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누군가의 삶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누군가 돈을 내고 보러 오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아니 그냥 영화를 만들 수는 있을까.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어 누군가를 상처줄바에는 아예 영화를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가도, 그런 영화라도 만들고 싶어 진다. 쓰레기 같은 영화일지라도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 석자를 박아놓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영화에 스쳐가듯 등장할 수 있다면. 그렇게 영화를 보고 만들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인생이라면 다시 한번 용기 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