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소녀>
영화를 보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마치 눈동자의 필터를 바꿔 낀 것처럼 한없이 넓은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럴 때 내가 정말로 이 세상에 두발 딛고 서있다고 느낀다. 내가 정말로 살아있다고 느낀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금 좀비 같은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걸어가지만. 그건 영화마다 다르다. 어떤 영화는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희미해지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집 가는 내내 나를 붙잡는다. 오늘 본 <말없는 소녀>는 집 가는 내내 나를 붙잡고, 절망하게 하고, 그럼에도 희망하게 만들었다. 이런 영화를 만들고 보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다. 세상을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다.
<말없는 소녀>를 보는 내내 슬펐다. 소녀의 침묵이 이해되었기 때문이고, '에블린'과 '션'의 친절에 감동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말없는 소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소녀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기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어떤 때에는 마음을 꾹 닫고 침묵한다. 소녀들은 왜 침묵할 수밖에 없을까. 소녀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끝까지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은 언제나 소녀들의 몫이다. 언제나 침묵하는 사람만이 침묵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침묵하는 자들은 언제나 표정으로 말한다. 그들의 표정은 알 수 없을 때가 많고, 무언의 슬픔이 서려있다. 감독 콤 베어리드는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같다. 영화 내내 '코요트'의 대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코요트'의 표정과 시선 묘사에 신경 쓴 장면들이 많다. 아마 콤 베어리드도 침묵하는 사람일 것이다. 침묵하는 사람만이 침묵의 표정을 그려낼 수 있다.
언제나 함께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몇십 분씩 침묵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언어는 내게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건 진실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뱉는 말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나는 말보다는 시선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침묵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지금까지는 한 명 만났다.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들은 대부분 잊었지만, 함께 어딘가를 바라보며 침묵했던 경험은 잊을 수가 없다. 무언의 침묵이 주는 연대와 감정의 공유는 깊고 강하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함께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