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올게요, 그 말 하나로 괜찮아진 하루

말 한마디가 하루를 바꾼다. 오늘은 그랬다.

by Heedo Shin

시리즈|루스트에서 살아남기
2025년 4월 6일, 일요일

#실수 #책임감 #고마움




< 인트로 >

별일 아닌 것처럼 시작되었지만, 마음은 하루 종일 분주하고 조심스러웠다. 실수도 있었고, 말을 잘못 전한 순간도 있었고, 내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날에 누군가 “또 올게요”라고 말해줬다. 그 한마디가 이 하루를 덜 부끄럽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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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트에서 바라본 제주의 바다. 창밖 풍경과 함께 먹는 따뜻한 한 그릇. / 혼자 살 때도 이렇게 만들어놓고 먹으면 참 좋겠다. 건강에도 좋고, 마음도 따뜻해진다.




- 철 수세미 사건, 그리고 마음이 남은 자리

출근하자마자 RR 누나가 브로콜리가 누락됐다고 했다. 결국 HJ 누나가 유통사 기사님이 물건을 두고 간 곳까지 직접 다녀와서 브로콜리를 챙겨왔다. 큰일은 아니었지만 시작부터 어수선했다.


오픈하자마자 배달 주문이 두 건 들어왔고 홀에도 손님이 제법 있었다. 8명 테이블 하나, 3명 테이블 하나. 가게가 오랜만에 북적여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3인 테이블 손님 중 여자아이의 까르보나라에서 철 수세미 조각이 나왔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근무하던 중에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라는 점이 더 충격이었다.


바로 HJ 누나와 RR 누나에게 알리고 손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렸다. 내 생각엔 전액 환불에 서비스 음료라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가게 결정은 까르보나라 값만 빼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드리고 후식 음료라도 드릴까요 여쭈었지만 손님은 괜찮다고 하시며 조용히 자리를 마무리하셨다.


그런데 내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장님이 음식값 다 빼드리래요”라고 말해버렸던 것 같다. 사실은 까르보나라 값만 빼드리는 거였는데, 그 순간 머리가 하얘지며 정확한 표현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손님이 계산서를 보시고 “다 빼준다더니 왜 일부만?”이라고 생각하셨을까 봐 계속 마음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계산할 때 손님이 “알겠습니다. 나중에 또 올게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한마디 덕분에 오늘이 완전히 부끄럽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 또 주차 이야기, 그리고 퉁명한 한 마디

가게 진입로에 누군가 차를 세워두어 전화를 드렸더니 여자분이 받으셨고 남자분에게 “차 잘 대놨어?”라고 물으셨다. 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들렸고 남자분은 퉁명스럽게 “응, 잘 댔어”라고 답했다. 그 말투에 괜히 내가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중히 부탁드린 것뿐인데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 치약과 왁스, 오늘도 계획 실패

치약을 안 챙겨 나와 배민 편의점으로 급히 주문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2만 원 이상 구매 시 5천 원 할인 이벤트도 있었고 치약과 왁스 제품에 1+1까지 붙어 있어서 ‘이건 진짜 완벽한 타이밍이다’ 싶었다.


그런데 주문하려는 찰나 손님 응대가 생겼고 다시 돌아와 보니 그새 재고가 부족해져 원하던 제품을 하나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치약도 왁스도 결국 놓쳤다. 그 순간 정말 이렇게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없지.




- “여기 위치가 안 보여요.”

오후 두 시가 넘어서 중년 손님 두 분이 가게에 들어오셨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위치는 진짜 좋은데 옆에 에이바우트 건물이 너무 커서 가게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 말에 정말 깊이 공감했다. 우리 가게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분들이 많다. 밖에서 광고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에이바우트에 오는 손님들이 많으니까 그분들께만이라도 그 건물 뒤쪽에 우리 가게가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 어떤 메뉴를 파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 북페어와 영화관, 엄마와의 하루

오늘과 내일은 제주에서도 북페어가 열리는 날이었다. 퇴근 후 30분 정도 AY에게 할 일을 옆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지도해주고 버스를 타고 한라체육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거의 한 시간 정도라 멀게 느껴졌지만 JY와 통화하면서 노트북으로 이것저것 작업도 하다 보니 체감은 금방이었다. 현장에 도착해서는 1시간 남짓 북페어를 즐겼다. 재미난 아이디어로 만든 독립서적들도 다양하게 구경하고 생각보다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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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포스터가 행사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 한 출판서적의 도서 중 유럽에서의 장면을 포착한 감각적인 구성. 제목부터 마음을 끌었다. 유쾌하고 발랄한 질문이 시선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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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그려낸 장면들엔 말보다 큰 울림이 있었다. 숲, 기차, 거울 같은 풍경은 마치 내 안을 비추는 듯했다.


KakaoTalk_20250410_145415351.jpg 섬세한 작업의 흔적들. 더 많은 작품을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오후 5시 반쯤엔 행사장을 나와 엄마와의 약속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KT VIP 멤버십 덕분에 나는 무료, 엄마는 할인으로 두 사람이 11,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오늘이 내가 엄마 영화 티켓을 처음으로 결제한 날일지도 모르겠다.


가는 길에 영화 보며 먹을 겸 닭강정을 샀다. 제주시 연동의 ‘달콤한 닭강정’이라는 가게였는데 솔직히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닭이 다소 질기고 양념도 부족하게 느껴졌고 끈적한 느낌만 남아 모양만 양념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입맛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단순한 개인 경험으로 남기기로 한다.




- 영화관의 젊은이, 그리고 아빠의 질문

영화 관람 중에도 앞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한 젊은 남성이 계속 휴대폰을 보고 중간에 일어났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고 속으로 ‘아직 어리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엔 제스코마트에 들러 집에 필요한 생필품과 파김치용 파, 장조림 재료들을 사 왔다. 집에 도착해서는 파를 깨끗이 씻어두고 잠깐 휴대폰을 보며 쉬고 있었는데 아빠가 내 방 쪽으로 와서 물으셨다. “배우고 있니?”


최근 아빠가 구상 중인 학원 정보 커뮤니티에서 각 학원 썸네일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 방법을 내가 어디서 배운 거냐는 질문이었다. 사실 난 따로 배우지 않았고 학원 관련 정보가 들어오면 그걸 바탕으로 만들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늘 말이 추상적이다. “이제 해야지”라는 말은 들었지만 갑자기 “모레부터 한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당황스러웠다.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하시는 마음은 안다. 무언가 새롭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런 서비스라면 아빠의 이상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 필요로 하고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싶어지는 무언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기획도 추상적이고 일정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나는 솔직히 아빠의 서비스 기획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진 않다. 물론 개인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그 완성도가 정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은 실수가 겹쳤던 날
치약과 왁스도 놓치고
그래도 고마운 말 한마디 덕분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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