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쁜 감정
첫 번째 이야기: 미움과 증오
서울로 전학을 온 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전국 각지와 해외로도 발령이 잦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는 평생을 살던 부산을 떠났다. 기나긴 주말 부부를 청산하고 온 가족 다섯이서 함께 낯선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매일 아버지와 저녁밥을 같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눈치 하나는 빨랐던 나는 학교 생활에 금세 적응한 듯했다. 서울말을 채 배우고 오지 못해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내 자리로 우르르 몰려왔다. '너 밥 먹었어? 말해봐' 하며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서울 친구들에게 서울말을 배우며, 부산 바다의 냄새를 잊어 갈 때쯤 나에게도 막역한 친구 하나가 생겼다. 거실 베란다에서 '민재야!' 하고 부르면 5초 뒤에 민재가 자신의 방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맞은편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 등교도, 하교도, 그리고 주일에 성당까지 함께 다녔다. 그야말로 서로에게 베스트프렌드였다.
베스트프렌드가 변한 건 2학기 무렵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나에게 쪼르르 왔던 민재는 어느 순간 다른 친구들과 무리 지어 교묘히 나를 따돌렸다. 나에게 다가오는 친구에게 눈총을 주며 학교 생활 내내 고립되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에는 생일 파티에 초대가 되어 들뜬 마음으로 선물을 들고 찾아갔다. 민재는 10명쯤 되는 모든 친구들을 한 방으로 부르더니 나를 벽 한쪽에 몰아세웠다. 그러고는 거실 부엌에 있는 아주머니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내가 왜 싫은 지에 대해 한 명씩 돌아가며 말하도록 시켰다. 터무니없는 일을 지어 내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그저 눈물만 흘렸다. 악마와도 같았던 민재는 성당에서만 천사가 되었다. 나중에는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잔인하게 이중적인 민재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에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쑥쑥 자라났다. 이후 학년이 달라지며 민재와는 멀어졌다. 누군가를 아주 미워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준 민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수치심
몇 년 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본 적이 있다. 김지영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통학버스 안에서 낯선 남성이 몸을 더듬는다. 지영은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고 이 경험은 어린 지영에게 두려움과 수치심을 남기는 사건으로 그려진다. 이 짧은 회상 장면에서 불현듯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 몸집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발로 퍽퍽 차며 하교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매일같이 걷는 길이지만 그날따라 길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걸어가는데 빵빵 경적 소리가 났다. 갓길에 세운 차 안에서 어떤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꼬마야, 아저씨가 뭐 좀 물어볼게~ 이리로 가까이 와봐."
나는 그 아저씨가 있는 차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자 아저씨는 대뜸 엉뚱한 걸 물었다.
"아저씨가 이러고 있는 거 처음 보지?"
"네?"
겨우 8살쯤이었던 나는 아저씨가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질문을 되물었다.
집에 와서는 평소처럼 놀다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다 보니 하교할 때의 일이 생각나서 엄마에게 그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엄마는 그 아저씨가 어떻게 하고 있었냐고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그제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상황이 더 웃겼다. 아저씨는 허벅지 위로 웬 감자 몇 알을 꺼내놓고 있었는데 그걸 왜 처음 보냐는 식으로 말했는지 모르겠다며 깔깔 웃어댔다. 엄마는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신 채로 낯선 사람이 부르면 절대 따라가지도 말고, 무시하고 집으로 오라고 가르쳤다. 그러게, 네가 조심히 다녔어야지, 하는 짜증 섞인 말과 함께. 뭐 얼마나 조심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빠가 알게 되면 일이 엄청 커질 거라며 내일부터 그 길로 오지 말라고도 했다.
이후 감자 아저씨는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놀랄 만큼 생생히 그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성인이 되어 다시 그 일을 꺼내보니 그 아저씨는 감자 아저씨가 아니라 그냥 변태 아저씨였다. 어린아이들에게 자신의 성기를 꺼내놓고 보여주는 걸 즐기는 바바리맨을 봤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10년이 가까이 지난 후에 알게 되다니. 놀라움과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그 어린 소녀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상에서, 직장에서 자잘한 성희롱을 겪을 때가 많다. 어떤 말, 어떤 시선, 어떤 농담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잘못됐다고 단호히 말하지 못한 채 그저 웃어넘기는 내가 답답할 때가 있다.
세 번째 이야기: 무서움
잠에 들기 전 매일밤 침대에서 기도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내가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고 주변의 것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덧붙이는 것이 있다. '이 세상에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전쟁에 대한 공포심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다. 내가 9살이 되던 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실미도'에 이은 두 번째 천만 관객 돌파 영화로 대한민국의 손꼽는 흥행작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은 거의 매 주말마다 다 함께 영화관을 찾아 조조 영화를 보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이른 아침 영화관을 갔다. 영화가 인기가 많아서인지 자리가 없어 우리 가족은 맨 앞줄에 앉았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장동건과 원빈,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6.25 전쟁으로 두 형제는 함께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고 전쟁터에서의 상황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연출된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쟁터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고, 부상당한 용사들의 온몸에는 구더기가 들끓었다. 눈을 질끈 감고 두 귀를 막아대도 전쟁의 잔상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토할 것만 같은 울렁거림을 이기지 못해 온몸을 웅크리고 맨 앞 좌석에서 전쟁의 장면에 압도당했다. 지금도 영화를 잠시 찾아보기 위해 검색했다가 몇몇의 장면을 보고 손이 떨려온다. 그때의 충격은 무서움을 넘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영화를 보고 몇 날 며칠 밥을 잘 먹지 못했고,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전쟁이 일어나는 꿈을 꿨다.
어릴 적 나는 무섭고 두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에 편지를 썼다. 그때의 편지를 찾아보면 온통 전쟁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아빠가 끌려가지 않게 해달라고, 아무도 죽지 않게 해달라고 울면서 편지를 쓰던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서른을 넘긴 지금도 전쟁은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이다.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발발하고 있는 전쟁 소식을 접하면 마음 어딘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저 애만 태우고 기도를 한다.
"제발, 이 세상에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