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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풀리 Oct 10. 2023

나의 자랑거리

세상에 차가움을 조금 알게 된 건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예진씨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잠시 통화 돼요?"

직감적으로 알았다. 곧 다가올 일이란 것을 늘 인지하려 노력했지만 끝내 외면하려 했던 것이 다가왔음을.

"프로그램이 폐지됐어요. 외국인들 위주로 프로그램 제작되고 당분간 연예뉴스는 없을 것 같아요. 또 일 생기면 연락 줄게요."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지금 통화 한 통으로 프로그램에서 잘렸다는 사실을 앞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피디님의 끝인사에 제대로 대답조차 못한 채 바보처럼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숟가락을 다시 들어 입으로 음식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맛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꾸역꾸역 눌러 넣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연신 숟가락질만 하는 모습을 보곤 남자친구는 침묵을 지켜주었다.


카페에 들어섰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울한 감정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아 남자친구에게 쓸데없는 말을 그렇게도 했다. 시시콜콜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데 느닷없이 훅 올라온 눈물이 기어코 비집고 터져 나왔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은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남자친구 앞이었지만 내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꽤 많았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꿈에 좌절된 불쌍한 아이로 비치기 싫어서, 그 작은 자리가 사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자리였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여러 이유로 눈물의 수도꼭지를 꽉 잠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잠시 흐른 침묵 속에 들린 말 한마디에 와르르 쏟아지고 만 것이다.

"무슨 일 있어?"


솔직하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감싸줄 어떠한 말도 있지 않았다. 이제는 좋아하는 게 방송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그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꿰찼는데, 꿈에 나올 정도로 정말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통한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경력 하나 없는 나를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뽑아준 고마운 곳이기도 했다. 최종합격을 전해받았던 날 펑펑 울며 한강에서 혼자 기쁨에 겨워했던 나의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고백했다. 방송을 너무 잘하고 싶은데 사실 그러지 못했다고, 카메라만 보면 온몸이 얼어붙어서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누구보다 카메라 앞이 설렜던 나였는데 이제는 두려움밖에 남아있지 않는 게 슬프다고 말했다. 이런 내가 방송을 계속 해도 되는건지 차라리 누군가 넌 될 깜냥이 아니라고 속 시원히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돌아와 방 문을 열었더니 화장대에 놓인 녹화 대본이 보였다. 수없이 줄 쳐진 대본을 보니 다시 마음이 찢긴 듯이 아파왔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나에게 이 리포터의 자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유일한 자랑거리였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연락되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요즘 뭐 하고 지내냐는 단순한 안부 인사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나의 자랑거리. 오늘 내가 전화 한 통에 잘린 이 리포터의 자리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그렇게 열심히 아나운서 준비 하더니 뭐라도 하고 있네'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유일한 자랑거리가 사라진 그날, 이불속에서 숨죽여 많이 울었다. 입술 끝에선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나 참 괜찮지 않은, 길고 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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