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째 이야기
나는 아이들 옷부터 챙겼다.
겉옷과 속옷, 양말 몇 켤레.
며칠 집을 비울 사람처럼,
필요한 것만 골라 가방에 담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손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뭐 하냐고 묻잖아.”
기척이 바로 뒤까지 가까워졌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손목이 거칠게 붙잡혔다.
“야.”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애들 데리고 나갈 거야.”
“… 뭐?”
그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갑자기 왜 이래!”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시간이 필요했어.”
잠시 말을 고른 뒤, 이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잠깐조차
기다려줄 마음이 없는 사람이야.”
그는 곧바로 받아쳤다.
“내가 뭐 대단한 걸 하래?
그냥 가서 네 도리만 하면 되는 거잖아!”
짧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아.
나도 내가 맏며느리라는 거,
그 도리가 뭔지도.”
말끝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가 없어.
그런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는 게 문제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당신은 한 번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보려고 한 적이 없어.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고.”
말을 꺼낼수록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졌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못 하겠어.”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도대체 뭘 못 하겠다는 거야?”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거.
당신이랑 계속 사는 거.”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숨이 막혀.”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제야, 내 말이 닿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붙잡힌 손목을 조용히 빼고 돌아섰다.
열어둔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채우지 못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앞에 앉아
남은 옷을 하나씩 접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