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카페를 다니는 이유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독서를 참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집 책장에는 어린이 위인전, 과학백과, 어린이를 위한 명작소설 같은 책들이 꽂혀 있었던 덕분에 자연스레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있는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동네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짧은 다리로 참 열심히 다녔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항상 바빴던 저의 어머니, 그리고 나이차가 많이 났던 누나와 형은 벌써 중,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오후 1시면 마쳤었기에, 그 시간부터 어머니가 오시는 저녁 7시까지는 항상 저 혼자였습니다.
집에 오면 조용하고도 적막한 공간이 저를 맞이했지만,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서관에 빌려온 책을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거든요.
적막한 방 한구석에서 혼자 책을 읽는 소년.
겉으로 봤을 때는 분명 외로워 보이고 보살펴주고 싶은 느낌이 들 겁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였던 저는 그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했습니다.
집에서 혼자 읽는 책은 생각보다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았습니다.
작가가 만든 책 속이라는 세상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걸 느낄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책을 읽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 글쓰기를 막 시작한 저에게 외로움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저는 오늘도 노트북을 챙겨서 사람 많은 카페로 향합니다.
북적북적 거리는 사람들과 즐거운 웃음소리들은 글쓰기에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닙니다.
조용한 집에서 편안한 복장과 자세가 더 좋은 건 이미 몸으로 느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주말마다 지하철로 30분이나 움직이면서까지 사람 많은 카페를 갑니다.
거기서 노트북을 펼치고, 무선 이어폰을 낀 채 글을 씁니다.
일부러 시끄러운 곳을 찾아가 놓고는 노이즈캔슬링이 되는 이어폰을 끼고 저의 세상에 빠집니다.
이 행위는 흡사, 에어컨을 틀고 이불을 덮는 것과 비슷합니다.
에어컨의 시원함과 이불의 포근함을 동시에 누리고 싶은 사치처럼, 저는 카페에서 사람들의 활기참과 저의 적막함을 동시에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카페에서 굳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있는 게 전부입니다.
이상하게도,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사람을 외롭게 만들더군요.
자전적 에세이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독서는 작가님이 만들어낸 "책"이라는 세계에서 마음껏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세계에서, 독자는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나"라는 자아를 잠깐 잊고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지는 시간이니까요.
반대로, 글쓰기는 철저히 "저"를 마주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자전적 에세이는 나의 과거와 나의 감정을 살펴보면서, 정제된 언어로 나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글을 쓰면서 본인을 계속 마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에 저 혼자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고독"이 찾아오는 거죠.
이 고독함을 누군가는 즐기기도 하겠으나, 저는 아직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는 단계입니다.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저는 이 고독을 애써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전에, 혼자 자취방에서 이 "고독"이라는 강적이 나타났을 때에는 무던히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싸워줄 아군을 찾기 위해 저는 카페를 이용하는 중입니다.
이 쓸쓸함, 외로움, 고독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숙명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는 책들은 전부 작가의 외로움과 고독을 자양분으로 탄생한 작품들이 아닐까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의 외로움을 달래준다는 것이 퍽 재밌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저는 외로움 때문에 방구석을 나와 카페로 향합니다.
군중의 소란스러움과, 그 속에서의 고독을 즐기는 사치는 제 글쓰기의 양분입니다.
앞으로도 저의 글들은 이러한 양분들로 탄생할 것이며, 그만큼 외로움을 더 마주하게 되겠지만 계속해서 걸어나가야 겠죠.
작게나마 바라건대, 이렇게 탄생할 저의 글들이 여러분이 잠깐 외로움을 잊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