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맨발 완주와 사유 17코스

17코스

by 한재영 신피질

어젯밤 밤새 토막잠을 잤다.

바람이 호텔을 무너뜨리려는 듯, 비행기 폭음 소리를 낸다.
밤 열 시 지나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이 초롱초롱하다.


호텔 창문을 열어보니 바람이 거세고 저 멀리 깜깜한 하늘에 비행기가 불빛을 밝히고 서서히 난다.


호텔 위치는 차로 제주공항과 십여 분 거리에 있다.
제주 남단인 가파도에서 제주 공항 근처 북쪽 해안에 왔으니, 제주 서쪽 지방을 다 돌았다.


호텔방은 방음이 잘 안 되어 세찬 바람소리, 대로를 빠르게 지나는 자동차 바퀴소리, 심지어 개구리울음소리도 들린다. 호텔 기능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아득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호텔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 12시 넘어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의 원인과 강도를 직접 확인하려고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가장 큰 소음의 주범은 바람이다. 검은 나무들이 허리가 꺾이듯이 휘청거린다. 특히 높이 솟구쳐 있는 서너 그루 야자 잎에 바람이 부딪치며, 대형 파도 소리를 낸다. 호텔 창문 방음시설이 엉망이다.




방음 잘 안된 호텔 옆 야자수


다시 잠을 자려고, 누워서 명상을 해본다. 나는 무엇인가? 나를 발견하려고 호흡을 관찰한다.


기억을 거슬러 오늘 출발에서부터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자세하게 더듬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호흡은 잔잔하지 못하고, 젖은 산 길과 아스팔트 길을 종일 걸은 발바닥은 밤새 화끈거린다.



소음 제거 귀마개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귀마개를 귀속에 틀어막으니, 밖의 소음은 희미해지고, 들리지 않던 이명이 새롭게 나타난다.


밤새 힘들게 잠이 들어도 아침은 언제나 싱그럽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고 부드럽다. 어젯밤 폭풍 같은 바람이 대기를 깨끗하게 청소해 시야가 선명하다.


지척에 한라산이 있는 듯 가깝게 보인다. 한라산 꼭대기 근처 바위 색이 선명하게 보이고 산 전체가 밑면이 길고 경사면이 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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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천에서 맑은 계곡물소리가 들린다. 무수천이라는 이름의 뜻은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하천이다.



나의 근심과 걱정은 무엇인가?



부처는 사성제의 원리에서 모든 고뇌는 집착에서 오고, 집착을 멸하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집착을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 집착하는 주체인 나를 소멸시키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멸시킬 나도 없다고 한다. 나라는 것은 실체가 없거나, 매우 제한적인 감각기관과 의식에 의해서 형성되었으니, 좀 더 깊고 넓게 들여다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고, 현재 내가 나라고 하는 것도 착각일 뿐이다.


‘내가 나다’는 착각을 명확히 인식하면 고집멸도가 가능하다. 막연하게 이해는 되지만 감각세계를 초월한 삶을 실천하거나, 내 몸에서 호르몬이 폭발할 정도의 대변혁 등이 일어난 적은 없다.


사실 나는 그런 초 현실적인 현상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고, 또 그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현대과학이 언급하는 양자론이나, 수천억 개의 은하 발견, 마이크로 세계 세포 내 기능 및 조직 연구, 세균 및 바이러스 발견과 부처의 사유는 큰 줄기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현대 과학은 부처의 세계를 몇 만 배 뛰어넘었다. 우리는 사유가 아니라, 인류가 그동안 축적하여 발명한 과학적 기구를 통하여 현실에 있는 것을 직접 관찰하고, 실체를 확인한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빅뱅 때 발생된 빛을 발견하고 저 멀리 수백억 광년 떨어진 은하를 관찰한다. 또 줄기 세포를 활용하여, 인간 조직을 만들고, 인간의 37조 개의 세포 내에 있는 DNA를 조작해서 선천적 질병을 원천적으로 예방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과학이 전혀 태동조차 하지 않았던 이천 년 전에 어떻게 그토록 깊게 사유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하면, 부처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한 인간으로서 경외심이 인다.



부처 이후 천년이 지난 후, 근심 걱정 관련 중국 불교 선종의 창시자 달마대사와 제자 혜가의 유명한 문답이 있다.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승려로, 중국에 선종을 전했다.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면벽 수행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혜가는 달마가 오랫동안 면벽수행 하고 있는 소림굴 앞에서 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달마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하자, 눈 내리는 한 겨울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라 바친다.
결국 달마의 제자가 되었다.
전설적인 이야기다.



혜가: 제 마음이 괴롭사오니,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달마: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하게 해 주리라.

혜가: 찾아보았으나,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달마: 그러면 내가 이미 그 마음을 편안케 하였노라.


현실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착은 소득 활동과 돈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소득 활동과 돈은 내가 하는 행위의 결과물이니, 원인인 내 행위에 중점을 둬야 한다. 내 행위의 주체는 나이니 나의 실체를 변화시켜야 새로운 결과를 만들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부처는 제행무상이다라고 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의식적으로 변화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세상이 변하고, 내가 자연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니 억지로 나를 변화시키겠다고 발버둥 칠 필요 없는 것 아닌가? 노자가 말하듯 물 흐르듯이 일상을 사는 것이다.


제주도에는 약 60개의 주요 하천이 있고, 이 하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대부분 바다로 흘러간다. 대부분은 평소에는 메마른 건천이다가, 비가 오면 물이 갑자기 많이 흐른다. 서귀포


정방폭포로 떨어지는 정방천, 외돌개천, 그리고 강정천등 있고, 제주 근처에는 천미천, 한천 월류천등이 있다.


수십 미터 깊게 파인 계곡에 후박나무와 칡넝쿨이 정글처럼 우거져 있다.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좁고 깊은 벽에 부딪쳐 반향이 크다.


드디어 돌 틈사이로 떨어지는 물이 보인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물은 힘차게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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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은 심장과 허파의 몫이다. 억울하고 슬프면 가슴이 미어진다. 맑은 계곡 물소리는 심장을 자극해서 원시적 슬픔을 치유하는 듯하다. 이는 동양의 전통 의학에서 감정과 신체 기관 간의 연관성을 강조한 표현으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아플 때 흔히 겪는 감정적 동요가 이를 반영한다.


공항 근처인 듯,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하늘에 2~3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을 질주한다. 자세히 들어보니 비행기가 지난 후 소리가 뒤따라 간다. 초음속 비행기다. 시속 1235킬로ㅡ마하 1 이상 속도다. 비행기는 항공사 이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낮게 비행한다.

가까이서 보니 하늘을 나는 거대한 새 같다.



쇠로 만든 거대한 새가 하늘을 빠르게 난다. 핵전쟁으로 지구가 모조리 파괴된 후 지하 깊숙한 동굴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다시 원시로 되돌아가, 후손에게 비행기를 표현하는 판타지 소설 속의 내용이다. 신화 속에 진실이 있을 수 있다.



250년 된 고령의 소나무와 팽나무, 인공으로 잘 다듬어진 하천과 누대등이 있는 외도동은 한라산에서 내려온 월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물이 맑고 경치가 빼어나 옛 선비들이 시조로 운치를 즐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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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천 길 지나 알작지 길 위다. 다시 바다다.


바다는 육지로 마구 밀려들 듯이 넘실대고, 거대한 실체가 압도적이다. 감청색 바다 저편에 수평선이 선명하다. 수평선은 산맥 같은 회색 구름 방파제가 바다 끝을 가로막는다. 도저히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구름 성벽 위로 담청색 하늘이 비단처럼 덮고 있다.



지금까지 들고 다녔던 등산용 스틱을 잊고 왔다. 이젠 두 발로 만 다녀야 한다. 두 개도 아닌 한 개이고 접히지 않아서 이번 여행 끝나면 버리려 했다. 스틱을 가지고 다닌 것은 행여 모를 개, 뱀, 기타 위협요소들에 대해 방어용이다.


아침에도 어제 숙소에서 면도기를 잊고 온 것을 알았다. 아무리 챙겨도 사람은 잊는다. 물건도 기억도 사람도 가끔은 잃어버리는 것이 정상이다.

제주 올레 길을 돌다 보면 백사장을 가끔 만난다.

백사장 주변은 대부분 관광지이고 호텔, 펜션이나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다.


이곳 이호태우 비치에서 넓게 잘 관리된 백사장, 백사장을 드나드는 얕은 바닷물에서 맨발로 걷는다.

발에 찰랑대는 바닷물과 발 밑에서 흩어지는 모래의 감촉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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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름은 청량한 휴식공간이다. 이곳 도두봉 공원도 빽빽한 나무가 주는 피톤치드 향이 그윽하다. 섬머리 도두봉 공원에 오르면 제주 공항이 한눈에 보인다. 비행기가 끝없이 이륙하는 모습이 선명하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여 이륙할 때 구름에 충돌하는 비행기 소리가 크다. 한라산은 구름이 잔뜩 있어 더 이상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 소리에 놀랬는지 한라산 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며 산이 드러난다. 제주도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금방 해가 있다가, 잠시 후 다시 구름이 해를 밀어낸다.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저 아래 바위에서 남녀 4명이 좌정하고 뭔가 흔들면서 빌고 있다. 시커먼 바다를 향하여 무엇을 빌까? 간절히 빌어 본 적이 있는가?


청계산 등산할 때는 정상 근처 돌문바위를 세 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빈다. 자연과 친화된 상태에서 소원은 세속과 관련이 없다.


제주의 기운을 받아 소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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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모든 삶은 흐른다라(원제는 바다의 철학) 책에서 바다 대양 섬 등대 항구 등 바다와 연관된 다양한 내용을 비유로 들면서 삶은 불확실과 끝없이 변화하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를 세울 것을 중요시한다.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며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과 가치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그의 책을 읽어 야겠다.



17코스는 제주시 북쪽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용두암은 제주 공항 근처에 있어, 관광객들이 더러 보인다. 용의 머리 형상을 한 시커먼 용암 덩어리가 제주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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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 도청이었던 관덕정은 17코스 종점 부근에 있고, 규모가 꽤 크다. 조선시대 제주는 전라도 관찰사 소속이었고, 관찰사 지휘를 받아야 하지만,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렸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임기가 3년이었지만, 제주 목사들의 평균 근무 기간은 1년 반정도로 대부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목사들의 평균 근무 기간이 짧아서, 제주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신임 목사들이 자주오기 때문에 이들을 맞이하고, 또 떠나는 사람을 보내느라, 제주도 사람들의 고초가 매우 컸다.


또한 제주는 귤 및 전복 등 특산물을 임금이나 왕족 고관대작에게 진상하기 위하여, 많은 수탈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7코스 종점은 정조대왕 시절 제주의 거상이었던 김만덕 기념관 앞이다.


신분 차별이 철저하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조선시대에 한때 노비였고, 여성의 몸으로 제주의 거상이 되었다.

제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쌀 300석을 기부하였다. 이 공로로 정조대왕을 알현했고, 금강산까지 구경했다.


한 시간 전 제주의 용왕께 기부할 수 있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뜻하지 않게 김만덕의 기부 내용을 접했다. 김만덕 영정과 내 모습이 중첩되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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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된 어른 김장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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