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경제로 환원되는 사회

Part1. AI시대 왜 기업을 다시 묻기 시작했는가?

by 한재영 신피질

나는 전통적인 삶의 기억을 아주 희미하게 가지고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돈보다 관계가 먼저였고 계산보다 체면이 앞섰으며 삶의 속도는 지금보다 훨씬 느렸다. 아무리 가난해도 귀한 음식을 장만해서 조상들의 제사를 정성 들여 지냈고, 명절에는 문중의 어르신에게 인사를 했다. 경사와 조사에 온 이웃이 함께 했다.


그러나 불과 한 세대의 시간 동안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와 자본화를 통과했고 그 과정에서 거의 모든 가치의 측정 단위가 돈으로 바뀌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든 결국 비용을 먼저 떠올리고 어떤 삶을 살든 자산의 크기로 안정을 가늠한다. 어쩌면 돈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지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이 변화는 단순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이동과 관련되어 있다. 시장경제가 확대되면서 노동과 토지, 화폐가 하나의 교환 체계 속에 편입되었고 인간의 삶 자체가 가격의 언어로 설명되기 시작했다. 경제가 사회 안에 머물던 질서에서 사회가 경제의 규칙에 맞추어 재편되는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흐름을 가장 일찍 통찰한 사상가가 칼 폴라니였다. 그는 근대 시장경제의 등장이 단순한 부의 증가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보았다. 공동체와 관습 속에 묻혀 있던 삶이 계약과 경쟁의 질서로 이동하면서 사회적 판단의 기준 역시 점차 가격의 언어로 수렴되었다.

한국 사회는 더 극심하게 변화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시간당으로 임금이 책정되어, 사람의 가치가 노동의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이 구조 위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이 불평등의 장기적 심화다. 토마 피케티는 방대한 역사 자료를 통해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될 때 부가 자동적으로 상층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부자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다. 부의 집중은 곧 삶의 기회가 자산 규모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를 의미하고 그 순간 돈은 선택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 조건이 된다. 돈이 삶을 설명하는 언어가 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격으로 환산되는 순간 인간은 불편함을 느낀다. 시장 논리가 효율을 제공하는 동시에 어떤 가치를 침식시키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교육과 명예, 돌봄과 시민성 같은 가치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들은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 문제는 시장이 커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시장의 논리가 삶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경제적 환원주의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방향의 삶을 실험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9세기 중반 미국 매사추세츠의 월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급적인 삶을 실험하며 인간이 얼마나 단순하게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려 했다.


반대로 레프 톨스토이는 세계적 명성과 부를 얻은 이후 자신의 신념과 귀족적 삶 사이의 모순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말년에는 재산과 명예로부터 멀어지려는 길을 택했다. 하나는 가능성을 향한 조용한 실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순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의 고통스러운 결단이었다. 두 사람의 길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삶이 계산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는 이 문제가 특히 예민하게 드러나는 무대다. 전통적 공동체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산업화와 도시화, 금융화가 폭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압축 성장’의 속도는 계층 이동의 희망과 격차의 공포를 동시에 만들었고, 부동산과 교육, 직장과 자산은 삶의 평가 기준을 빠르게 흡수했다.


여기에 고령화와 높은 노인 빈곤율, 백세 시대의 도래가 겹치면서 불안은 개인의 기분이 아니라 사회의 바탕 감정이 되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버티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안전장치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많은 사회 이슈가 결국 돈으로 측정되고, 돈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일상의 대화와 뉴스의 결론이 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 가치와 인간적 규범이 약해진다는 감각도 커진다. 손익 계산이 삶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말이 되면서, 다른 언어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삶을 통해 다시 드러난다. 경남 진주에서 한의원으로 번 돈을 평생 장학사업과 교육·문화 지원에 돌려주며 자신은 자동차 한 대 마련하지 않은 채 검소한 삶을 이어온 김장하의 선택은 부를 거부한 금욕이 아니라 부의 의미를 사회로 되돌린 실천에 가까웠다.


돈으로 등급을 매기는 사회 속에서도 다른 질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조용한 실천은 경제적 환원주의가 절대적인 운명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하나의 증거였다.



최근 논의되는 기본소득 역시 같은 질문 위에 놓여 있다. 인간의 최소한의 삶을 시장 바깥에서 보장하려는 시도는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기보다 돈만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설명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이는 경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 조건에 대한 물음에 가깝다.


결국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이 이 모든 논의를 다시 되돌려 놓는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끝까지 계산할 수 없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순간들을 가격으로 환산하는 일을 망설이게 만든다. 관계와 기억, 사랑과 의미 같은 것들이 끝내 돈의 언어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경제로 말해지는 시대에도 인간의 삶 전체가 경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돈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삶의 마지막 질문이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온전히 살아보았는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이 남아 있는 한, 사회 역시 단 하나의 가치로 완전히 닫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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