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길 도착 및 숙소 1차 -1일

2018년 4월 16일 · 1일 차

by 한재영 신피질

오후 5시, 김포공항 3층 라운지.

프로스트의 ‘가지 않았던 길’을 떠올리며 자발적으로 집을 나섰다.

지금까지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집 맴돌기 여행’이었다.

가족과 욕망이라는 탯줄을 가슴에 묶은 채, 반드시 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떠났고, 길어야 일주일이었다.

이번처럼 한 달 가까운 긴 여행 계획은 처음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별의 감정이 올라온다.

태만, 자기기만, 변명으로 가득 찼던 과거의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과거의 나’와 작별을 고한다.

예전처럼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 여행이 아니라, 이번에는 정말 떠나기 위해 떠난다.

앞으로 머무는 곳이 곧 삶의 무대가 될 것이다.


여행 전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졌다.


- 맨발로 올레길을 완주한다.

- 한라산에 오르고, 우도를 걷는다.

- 면도, 샴푸, 비누를 생략하며 가능한 원시적 상태를 유지한다.

- 커피와 술 같은 감각적 쾌락을 억제한다.

-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택시는 가급적 피한다.

- 육체를 단련하고, 명상을 생활화한다.

- 기록하고 사진을 남긴다.

- 하루를 이른 아침에 시작한다.


아시아나 항공은 저녁 6시 30분 제주 출발 예정이다.

공항 라운지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실천하자고 다짐한다.

그중 첫 번째는 제주 올레길 완주다.



항공기 지연으로 제주 도착했을 때는 올레센터는 이미 문을 닫았고, 예약했던 게스트하우스도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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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1코스 시작점 부근인 고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아직 숙소는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기존의 나를 벗고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 제주에 왔다.

지금까지는 돈을 벌고, 인정받고, 출세하기 위해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삶을 내려놓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재산, 권력, 명예는 더 이상 나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들은 쫓을수록 절망만 남긴다.


나는 내 의지로만 형성된 존재가 아니다.

유전자, 성장 과정, 사회 환경 등 외부적 요인이 결합된 복합체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잘못을 스스로 탓하며 살아왔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늘 자책을 반복했다.

이제는 그러한 습성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시점이다.

불안, 미래에 대한 과도한 욕망, 타인에 대한 기대, 지속하지 못하는 습관들… 그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한다.


하루 종일 혼자 걷는다면 내면의 질서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사물과 사건에 대해 나 스스로 가치 판단을 내리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기쁨의 원천을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존재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될 것이다.


새벽 어스름,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보면 강렬한 행복감이 솟아난다고 한다.

명상을 통해 그 감각을 체득하고, 반복적으로 학습해 보자.


내 몸은 37조 개의 세포, 40조 개의 미생물, 끊임없이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이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통합되고 변화하며 생멸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불교는 ‘공(空)’이라고 답한다.

실체 없는 아바타 같은 상태, 찰나의 존재일 뿐이다.


제주공항에서 101번 버스를 타고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한 시간 이동해 종점인 성산 근처 대정에 도착했다.

버스는 깨끗하고 요금도 저렴했다.


버스 안에서 갑자기 배고픔이 몰려왔다.

밤 10시가 넘어 저녁을 먹지 못한 허기가 밀려온다.

버스 기사에게 편의점 앞에서 잠시 세워 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절절한 배고픔이다.

낯선 땅에 오니 생리적 욕구가 강해지는 것 같다.


운전기사와 승객의 대화를 들으니 제주 방언이어서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밤 11시가 넘어 종점에 도착했는데, 나는 마지막 승객이다.

정류장 주변엔 희미한 불빛만 있고, 그 건너편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버스 기사 말 대로 100미터쯤 걸으니 불이 켜진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국밥을 시켰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고, 멀미도 가라앉았다.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 있어 다 먹지도 못했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근처 숙소를 물으니, 이 시간에는 찜질방 밖에 없단다.

찜질방 간판은 요란한 LED였지만 내부는 시골 분위기였다.

찜질방은 가난한 여행자에게 저렴한 숙소다.

코 고는 사람만 없다면 견딜 만했겠지만, 밤새 상념과 후끈한 열기로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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