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0일
제주도 올레길을 완주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2018년 4월, 1코스부터 시작해 산방산이 있는 10코스까지 약 십여 일간 동쪽과 남쪽 서귀포 일대를 걸었다. 당시에는 직장을 잃은 직 후였다. 맨발로 올레길을 돌며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변화를 모색하고자 했다. 어쩌면 제주 올레길의 기운이 내 삶에 자극이 되어, 새로운 변화를 희망했는지 모른다.
그때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을 활용해 다양한 풍경과 그 순간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했고, 정성 들여 글로 다듬었다. 언젠가 책으로 엮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글은 많이 썼지만, 단 한 번도 외부에 발표하지 않았다. 블로그나 페이스북도 하지 않았고, 그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에게 소극적으로 공유하는 정도였다.
'마저 완주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마음을 다잡고, 마일리지를 활용해 출발과 귀국 일자를 예약하고 항공권을 구입했다.
벌써 7년이 흘렀다.
예약을 마친 뒤, 익숙한 일상을 떠나 혼자 낯선 곳으로 향한다는 막연한 거부감이 마음속에서 일었다. 매일 아침 피트니스에서 턱걸이를 하기 전, 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이른바 '샌님 스타일'이었다.
육체가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 갑자기 낯선 활동에 직면할 때,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저항 심리가 작동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시간과 목표를 설정하고, 생각을 최대한 멈추며 습관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세팅된 기계처럼, 정해진 대로 움직이려 한다. 아무리 하기 싫고 실력이 없어도 반복하면 는다. 턱걸이를 다시 시작했을 땐 겨우 3회가 한계였지만, 3개월이 지나니 어느덧 10회까지 가능해졌다.
인간의 먼 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약 400만 년 전 출현했고,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 등장했다. 선조들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다가,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황하 지역에서 문명이 갑자기 출현했다.
이 시대의 인류는 인간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 존재에 의해 창조되고, 지금도 DNA나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국의 작가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은 『신의 지문』에서 외계문명설을 주장하며, 외계인이 현재 전해오는 신화에 있는 신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찰스 다윈이 들었다면 어처구니없어했겠지만 말이다.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끊기지 않는다. 직장을 잃고 가족의 눈치를 보며 폐쇄적인 심리 상태에 빠졌을 때조차, 자연과 공동체의 연결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 인생의 돛을 세우게 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 생겨난 새로운 경험이 내 삶을 확장시키고 의식을 고양시켜 주었다.
삼성전자에서 퇴임 후, 에스원, 시큐아이 그리고 환경 관련 벤처 업계에서 부사장으로 일했고, 대학에서 3년간 비전임 교수로 학생을 가르쳤다. 최근 4년은 반도체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했다.
지난 10년 동안 매일 새벽 30분 명상, 백팔배 절, 팔 굽혀 펴기를 꾸준히 해왔다. 구룡산, 청계산, 관악산을 맨발로 다녔고, 이번에도 제주 올레길을 맨발로 걸을 생각이다.
배낭을 꾸리면서, 최첨단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도 여행길에 나서면 결국 의식주 문제로 돌아간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만약 이번이 내 삶의 마지막 여행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과연 삶의 마지막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제주는 비가 잦으니 단단한 우비를 챙기고, 햇빛이 강할 수도 있어 양산과 선블록, 창이 넓은 모자, 얼굴 가리개도 챙겼다. 평소 쓰지 않던 선글라스도 준비했다.
집 근처 병원에서 파상풍 주사도 맞았다. 10년 만의 접종이었다. 수많은 산길을 맨발로 걸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제는 맨발로 걷는 게 익숙하다. 땅을 조심스레 살피기보다는, 멀리 보이는 파노라마와 인근의 나무, 돌, 숲의 변화에 집중하며 유유자적 걷는다.
최근 십여 일간 인공지능 관련 책을 몇 권 읽고, ChatGPT 유료 버전도 신청해 잘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할 듯하다. 전자제품에 AI 기능이 없으면 잘 팔리지 않는 시대다.
AI에게 올레길 숙소나 식당, 코스 정보를 물어보면 즉시 답변이 온다. 이번에는 AI를 여행 동반자로 삼을 계획이다. 또 7년 전과 달리 서두르지 않고 제주의 자연, 마을, 도시를 천천히 느낄 예정이다.
진정한 자유 여행은 의식주를 모두 짊어지고 들판과 산, 다리 밑과 동굴 같은 야생에서 지내며, 일몰과 새벽 여명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텐트 밖으로 나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비로움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텐트를 짊어지고 야생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나 또한 그럴 만한 각오가 없다. 그래서 주어진 환경 안에서 조금씩 적응하고, 평범한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내면의 자유와 행복을 느끼려 한다.
심심할 때 읽을 책도 하나 챙겼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의 『걷기 예찬』이다. 걷기에 삶을 건 이들의 사례와 걷기의 철학적 사유가 잘 녹아 있는 책이다. 몇 년 전 읽었지만, 이번 올레길 여행의 지팡이처럼 의지가 되어줄 듯해 챙겼다.
간식거리로 떡과 포장된 치즈를 챙겼다가 아내에게 들켰다. 떡은 상하고, 치즈는 녹는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70년대에도 냉장고 없이 잘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인류는 새로운 문명에 놀라울 만큼 빠르게 적응해 왔다.
제주도에는 약 70만 인구가 거주하고, 곳곳이 관광지라 식당, 편의점, 숙박 시설이 잘 마련돼 있다. 그래서 간식은 견과류 몇 개만 챙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