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기수요 — 호르무즈 이후, 에너지 질서의 재편

by 한재영 신피질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세계 에너지 시스템의 가장 취약한 지점 가운데 하나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4년 이 해협을 통과한 석유는 하루 평균 약 2,000만 배럴이었고, 이는 세계 석유 소비의 약 20%에 해당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2025년 약 2,000만 배럴이 이 해협을 통과했고, 대체 가능한 우회 수송 능력은 대략 하루 350만~550만 배럴 수준에 그친다고 본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가 흔들리면 일부 우회는 가능하지만 전체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원유만이 아니다. EIA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LNG 교역의 약 20%도 호르무즈를 통과했다. 카타르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아시아가 핵심 수요처였다. 최근 Reuters 보도에서도 일본 정부는 호르무즈를 지나는 천연가스의 거의 80%가 아시아로 향한다고 설명했다. 즉 이 해협의 불안은 유가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LNG 가격, 전력도매가격, 도시가스 비용, 산업용 연료비를 동시에 자극한다.


한국의 취약성은 이 구조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Reuters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원유의 약 70%를 중동에서 들여오고 있고, 나프타의 절반가량도 호르무즈를 지난다. 이는 단순한 연료 문제가 아니다. 나프타는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이기 때문에 공급 차질은 곧 에틸렌, 플라스틱, 합성섬유, 용제, 자동차와 건설용 중간재 가격에 연결된다. 실제로 LG화학은 이란 전쟁에 따른 나프타 공급 차질로 여수 에틸렌 설비 일부를 멈췄다. 에너지 지정학이 곧 제조업 원가 구조의 문제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 더 봐야 할 것이 있다. 공급 충격은 유가로만 끝나지 않는다. 정유업계가 대체 조달에 나서면서도 운임과 보험료 상승을 감수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해협이 막히면 원유 가격이 오를 뿐 아니라 선박 보험료와 용선료가 오르고, 우회 항로 비용까지 붙는다. 결국 에너지 위기는 물가와 공급망 비용 전반으로 번진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중동 뉴스가 아니라 글로벌 제조업의 비용 구조를 흔드는 사건이다.


이 지점에서 AI가 에너지 문제를 한 단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최근 IEA의 『Energy and AI』 보고서는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2024년 약 460 TWh에서 2030년 약 945 TWh로 늘고, 2024~2030년 동안 연평균 약 15%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전 세계 전체 전력수요 증가율보다 4배 이상 빠른 속도다. IEA는 또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을 위한 발전량이 2030년 1,000 TWh를 넘고, 2035년에는 1,300 TWh 수준까지 갈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단순한 IT 수요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력 수요 산업이 새로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AI 전력수요가 국가 전체에 고르게 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는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따라서 문제는 국가 평균 전력량이 아니라 지역 송전망, 변전 설비, 냉각 설비, 전력 품질에서 먼저 발생한다. AI 시대의 병목은 “전기가 없어서”라기보다 “전기가 필요한 곳까지 제때, 안정적으로, 충분한 품질로 가지 못해서” 생긴다. 그래서 앞으로의 에너지 경쟁은 단순한 발전 경쟁이 아니라 발전, 송전, 변전, 냉각, 백업전력을 하나로 묶는 인프라 경쟁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재생에너지만으로 AI 시대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재생에너지는 계속 늘겠지만, 간헐성과 계통 안정성 문제가 있다. ESS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나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이 아니다. 전력을 저장하고 시간대를 이동시키는 기술일 뿐이다. 따라서 ESS는 중요하지만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수소도 마찬가지다. 산업 원료나 장기 보완 수단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가까운 시기에 대규모 기저전력을 대신할 현실적 해법은 아니다. 결국 핵심은 여전히 안정적인 대량 전력 생산이다.


그래서 원자력이 다시 논의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다만 여기서도 냉정해야 한다. 원자력은 사고 위험과 폐기물 문제를 안고 있고, 특히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아직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완전 해법이 없다. 핀란드식 심층 지층 처분이 가장 현실적인 방향으로 평가받지만, 모든 나라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각국이 원전을 다시 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동시에 탄소를 줄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소형원자력발전 SMR은 이 맥락에서 자주 언급되지만, 현재 시점에서 과장해서는 안 된다. IAEA도 전 세계에 80개가 넘는 SMR 설계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개발 단계라고 설명한다. 즉 SMR은 이미 상업적으로 널리 쓰이는 기술이 아니라, 상용화를 향해 가는 기술이다. 다만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처럼 지역 단위에서 안정 전력이 필요한 수요가 커질수록, SMR 개발과 규제 정비 압력은 분명히 강해질 가능성이 크다. 요약하면 SMR은 “이미 성공한 기술”이 아니라 “성공이 요구되는 기술”에 가깝다.


국가별 방향도 조금씩 갈라지고 있다. 유럽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계속하지만 높은 전력가격과 산업 경쟁력 약화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일본은 현실적으로 원전 활용 쪽으로 다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더 실용적이다. 재생에너지, 석탄, 원전, 초고압 송전망을 동시에 밀어붙이며 에너지 안보와 전력 자급률을 함께 강화한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최근 LNG 차질로 다시 석탄 사용을 늘리고 있다. 이는 친환경 정책의 후퇴라기보다, 위기 국면에서 각국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공급 안정성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모든 흐름을 종합하면, 앞으로 중요한 산업은 분명해진다.


첫째는 기저전력 산업이다. 기존 대형 원전 체계에서는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프랑스의 EDF 같은 기업군이 다시 중요해질 수 있다.


둘째는 전력 인프라 산업이다. 발전보다 전달이 병목이 되기 때문에 LS일렉트릭, 대한전선, 독일의 지멘스 에너지, 프랑스의 슈나이더 일렉트릭 같은 기업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셋째는 데이터센터 전력·냉각 인프라 산업이다. 버티브 같은 기업이 대표적이다. 이 분야는 AI 성장의 직접 수혜를 받는다.


넷째는 보조 영역으로서 ESS와 배터리다. 테슬라의 메가팩, LG에너지솔루션, 삼성 SDI 같은 기업들이 이 흐름에 연결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전력 생산을 대체하는 축이 아니라 전력 시스템을 보완하는 축이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위에서 움직이던 시대에서, 각자의 전력 생산과 전력 인프라 능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대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석유를 가진 국가가 힘을 가졌다면, 앞으로는 전기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보내고, 관리할 수 있는 국가와 기업이 더 큰 힘을 가지게 된다.


미국의 패권이나 달러 체제의 향방을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번 사태가 보여준 것은 하나다. 특정 해협, 특정 지역, 특정 공급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동의 전쟁은 당장의 유가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AI 시대에 필요한 전력, 그리고 그 전력을 누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지정학적 충돌이 아니라 에너지 질서와 산업 질서가 동시에 이동하는 신호에 가깝다. 이제 경쟁의 기준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누가 더 많은 석유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안정적으로 전기를 만들고 전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전 26화AI 군산복합체 — 알고리즘이 전쟁을 설계하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