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1부, 세상을 떠받치는 작은 존재

벌에 대한 AI 학습 내용

by 한재영 신피질

벌은 작다. 그러나 이 작은 존재가 빠지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과 식량 체계는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IPBES와 FAO가 인용하는 수치에 따르면 전 세계 야생 꽃식물의 거의 90%가 동물 수분에 적어도 일부 의존하고, 세계 식량작물의 75% 이상도 생산량이나 품질 면에서 수분의 영향을 받는다. 다만 이 말이 곧 “인간 식량의 75%가 모두 벌 없이는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쌀과 밀처럼 바람수분이나 자가수분에 크게 의존하는 작물도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일과 채소, 견과류, 커피, 코코아, 유지작물 같은 고부가가치 식품의 상당 부분이 벌과 다른 수분곤충의 반복된 방문 위에서 성립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벌은 단순한 곤충이 아니라, 식물의 번식과 인간의 식탁을 이어주는 생태계의 연결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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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한 집단은 한 마리 한 마리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한 벌통에는 여왕벌 한 마리와 수만 마리의 일벌,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수벌이 함께 살고, 여왕벌은 산란을 맡고 일벌은 청소와 육아, 벌집 관리, 꿀 저장, 경비, 채집을 맡는다. 꿀벌 사회에는 개미처럼 독립된 “병정 계급”은 없지만, 일벌 일부가 벌집 입구를 지키는 경비 역할을 수행하며 필요할 때 방어자로 전환된다. 벌 사회의 핵심은 엄격한 고정 계급보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기능 분담에 있다.


꿀벌은 알-유충-번데기-성충의 완전변태를 거치며, 대체로 여왕벌은 약 16일, 일벌은 약 21일, 수벌은 약 24일 만에 성충이 된다. 여름 일벌의 수명은 보통 4~6주에 그치지만, 여왕벌은 2~5년가량 산다. 같은 종, 거의 같은 유전정보를 가진 존재가 먹이와 생리적 경로의 차이만으로 전혀 다른 몸과 수명을 갖는다는 사실은 꿀벌 사회를 더욱 경이롭게 만든다.



벌의 생애는 짧고 정교하다. 알에서 시작해 유충과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기까지 약 3주가 걸리고, 여름의 일벌은 대략 한 달 남짓을 산다. 그러나 여왕벌은 몇 년을 살아간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존재가 전혀 다른 수명을 갖는 것은 먹이와 환경이 생명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벌은 태어나자마자 벌집을 청소하고, 유충을 돌보고, 집을 짓고, 마지막에야 밖으로 나가 꽃을 찾는다. 삶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벌의 노동은 정교하지만 결과는 작다. 벌 한 마리가 평생 만들어내는 꿀은 티스푼의 일부에 불과하다. 꿀 한 숟가락은 수천 번의 비행과 수많은 꽃 방문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며, 그래서 꿀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시간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꿀의 의미는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겨울이 존재하는 온대 지역에서는 꿀이 생존을 위한 저장 식량이지만, 동남아와 같은 열대 지역에서는 꽃이 연중 존재하기 때문에 대량 저장의 필요가 크지 않다. 그렇다고 열대의 벌이 꿀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꿀은 여전히 만들어지지만, 저장보다는 순환에 가까운 방식으로 사용된다. 꿀은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벌과 꽃의 관계는 공진화의 산물이다. 벌은 자외선을 감지하고, 많은 꽃은 인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자외선 패턴으로 꿀의 위치를 알려준다. 우리가 보기에는 단순한 흰 꽃이나 노란 꽃도 벌에게는 ‘착륙 유도선’이 있는 신호판일 수 있다. 벌은 단순히 색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보상이 있는 꽃을 학습하고 기억한다. 그래서 꽃의 색과 향, 형태는 인간의 미적 기준 이전에 벌 같은 수분자를 향한 생태적 언어다. 꽃은 인간을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벌에게 보이기 위해 피어난다.



그러나 이 정교한 시스템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벌의 감소가 보고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관리되는 꿀벌 군집의 손실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현상이 단일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후 변화, 농약, 질병, 먹이 부족이 동시에 작용하며 벌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도 벌 개체수 감소가 관찰되고 있으며, 특히 겨울 이후 군집 손실이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상기후와 질병, 먹이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현재 한국 양봉은 대부분 서양벌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봉군 기준 약 95% 이상이 서양벌이다. 토종벌은 약 5%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생산성과 효율을 선택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특정 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구조이기도 하다. 자연은 다양성으로 안정성을 유지하지만, 인간은 효율을 선택하며 그 균형을 바꾼다.


현장에서 보이는 작은 변화들도 이 흐름과 연결된다. 같은 장소에 여러 개의 벌통을 두어도 일부만 활성화되고, 벌들이 꽃을 찾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온도 변화는 그 원인 중 하나일 뿐이며, 실제로는 에너지 부족과 환경 스트레스가 함께 작용할 때 이런 현상이 더 쉽게 나타난다. 자연의 붕괴는 언제나 여러 요인이 겹칠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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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꿀을 건강식품으로 여기고 특별한 효능을 기대하지만, 꿀의 본질은 여전히 당이다. 소량의 항산화 성분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몸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꿀을 찾는 이유는 건강 때문이라기보다 안심 때문이다. 인간은 음식을 통해 영양뿐 아니라 의미와 위안을 함께 소비한다.


벌은 작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 부재는 거대한 결과로 드러난다. 벌이 줄어들면 식물의 번식이 약해지고, 먹거리의 다양성이 줄어들며, 생태계의 연결이 느슨해진다. 자연은 거대한 존재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의 반복 위에서 유지된다.


벌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이 작은 존재는 지금도 꽃과 꽃 사이를 오가며, 세상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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