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치료사는 있는걸까?
나는 요즘 환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치료를 받으러 왔지만,
정작 무엇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치료를 받는 환자가 있었다.
패드는 엉뚱한 곳에 붙어 있었고,
그 자극으로는 움직임이 나올 수 없다는 걸
조금만 배워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치료는 이어졌다.
움직임은 없었고,
대신 대화는 많았다.
치료사는 환자와 금세 친해졌다.
웃음이 오갔고,
환자는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치료는 사라지고,
관계만 남아 있는 장면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시간을 들였다.
패드를 다시 붙이고,
왜 여기에 붙여야 하는지 설명하고,
반응을 보며 조정했다.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그래도 그게 내가 배운 치료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감사가 아니라 무시였다.
환자는 나를 보며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에게
나는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혼란스러웠다.
내가 배운 건
환자의 움직임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반응을 보고 수정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는
그 모든 게 불필요한 집착처럼 취급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이 환자에게 치료가 아니라
말로 다가가야 하는 걸까.
전문성 대신 친절을,
기술 대신 농담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이건 전기치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치료에서도 마찬가지다.
목표는 흐려지고,
대화는 늘어난다.
재활은 사라지고,
수다만 남는다.
치료실은 점점
마사지 판처럼 변해간다.
움직임의 변화보다
기분의 변화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 안에서 전문성은
조용히 뒤로 밀려난다.
나는 도수치료가 망가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대하는 태도가 무너지고 있다.
왜 이 손을 쓰는지보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때 떠오른 말이 있다.
예전에, 정말 실력 있다고 느꼈던 한 선생님이
내게 해줬던 조언이다.
“선생님의 가치를 아는 곳에서 일하세요.”
그 말은
국내 교육이 아니라
해외 닥터 교육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는 솔직히 공감하지 못했다.
조금 이상적인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병원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그 말이 몸으로 와 닿는다.
전문성이 필요 없는 공간에서는
사람도 금세 닳아버린다는 걸.
요즘 나는 자주 자괴감을 느낀다.
치료사가 아니라
마치 다방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말을 맞추고,
기분을 살피고,
불편하지 않게 시간을 채우는 일.
그게 내 직업이었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곳에서는
동료라는 감각도 흐릿하다.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는 관계가 아니라,
환자를 두고 경쟁하는 구조에 가깝다.
누가 더 치료를 잘하느냐보다
누가 더 말을 잘하느냐가 기준이 된다.
결국 이 치료실에는
치료가 아닌 말만 남는다.
움직임은 사라지고,
소리는 커진다.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알던 치료사를 계속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내가 알던 치료사는
정말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미 사라진 존재를
혼자 붙잡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