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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쟁이 Sep 23. 2023

짜장면과 스피커

어젯밤 바닥에 스마트폰을 떨어뜨린 후 액정에 문제가 생겼다. 오전에 그림책 모임이 있는 아내를 교회에 내려주고 폰을 수리하는 곳을 찾아갔다. 네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모두 폐업한 상태였다. 결국 신부동의 업체를 방문해 액정을 교체했다. 아내가 모임이 끝나면 같이 점심을 먹을까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분주하게 다녀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모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데다 오후에는 할 일이 많으니 따로 식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짜장면을 먹으러 교회 옆 중국집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눈이 마주친 사장님이 마침 하나 남은 일인 테이블로 안내해 주셨다. 이 집에서 여러 음식을 먹어봤지만 단연 최고는 짜장면. 곱빼기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짜장면을 먹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잠시 후 흰 그릇에 그득 담긴 짜장면이 도착했다. 상큼한 오이채가 올려진 걸 보니 갑자기 입맛이 확 돌았다.

내가 다닌 대학 교내 식당은 중식을 팔았다. 짬뽕을 좋아하던 동기 중 한 녀석은 “oo아. 뽕 때리러 가자”라며 날 짬뽕의 세계로 인도했다. 친구 덕에 서서히 짬뽕의 맛을 알게 된 나는 결국 뽕 중독이 되었다. 발란스 게임의 단골 질문인 “짬뽕? 짜장?”에도 내 대답은 주저 없이 짬뽕이었다. 그런 내가 최근에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젓가락을 들어 짜장면을 비비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요즘 갑자기 이렇게 짜장면이 땡기지? 난 원래 짬뽕파인데.” 방금 수리를 마친 폰을 들고 카메라 앱을 열었다. 왠지 이 순간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고독한 중식으로 중식을 먹으면서 어릴 적 먹었던 짜장면을 떠올렸다. 명산동 사거리에 있던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비좁은 중국집.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가장 많이 가본 식당인 그곳에서 나는 주로 짜장면을 먹었다. 기념일은 늘 짜장면과 함께였다. 짜장면은 이제 흔하고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 되었는데 종종 나는 짜장면과 함께 있다. 어릴 적 그때처럼.


점심 먹고 집에 와서 미뤄둔 일들을 마치고 아산으로 향했다. 곧 있을 당근 거래를 위해서다. 어젯밤 당근 앱에 들어갔다가 인켈 스피커가 올라온 걸 봤다. 꽤 좋은 모델인데 가격이 터무니없이 쌌다. ‘5만 원이라고?’ 곧바로 채팅하기를 누르고 이상 유무를 물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약속을 잡았다. 몇 년 전 중고 인켈 앰프와 스피커를 사기 위해 군산까지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스피커가 먹통이었다. 군산까지 반품하는 게 시간과 차비가 아까워 앰프만 사용하고 스피커는 세워두기만 했었다. 그러다 어제 지난번보다 더 좋은 사양의 저렴한 스피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가는 길이 낯이 익었다. 두 달 전 후배 딸의 돌 식사를 했던 곳 바로 옆에 있는 골동품 가게였다. 차에서 내려, 가게 앞을 기웃거렸더니 사장님이 문을 열고 나오셨다. 초콜릿색의 커다란 스피커 두 짝이 놓여 있었다. 집에서부터 들고 간 앰프에 오디오를 연결하고 준비한 여러 종류의 CD로 성능을 테스트했다. 지난번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스피커 상태를 살피는 나를 보고 판매하는 사장님이 대번에 내가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가게 안 여러 빈티지 오디오들을 구경시켜 주시더니 가게와 연결된 뒤쪽 창고까지 데려가 주셨다. 거기에는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오디오들이 있었다. 거래를 마치고 나오는데 사장님이 스피커가 무겁다며 차에 싣는 걸 도와주셨다. 매너 온도가 높은 이유가 있었다.

아들이 집에 있길래 불러내 함께 스피커를 나르고 기존에 있던 고장 난 스피커는 고쳐 쓰실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당근에 무료 나눔을 했다. 순식간에 4명이나 연락이 왔다. 이렇게 인기가 좋을 줄이야.


음악과 함께였던 어린 시절, 오디오를 무척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 부모님이 일체형 오디오 하나를 사주셨다. 오디오 하나에 많은 게 바뀌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 것도, 음반을 사기 위해 돈을 아껴 쓰게 된 것도, 고요한 밤을 좋아하게 된 것도 모두 오디오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은 음악을 듣는 일이었고,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도 오디오 앞이었다. LP를 꺼내 벨벳으로 된 클리너로 닦아주고,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둔 다음 손가락으로 바늘을 수평으로 이동해서 수직으로 내려놓는다. 귀에 음악이 전달되기까지 손은 늘 분주하다. 그 오디오가 바로 인켈 제품이었다. 지금이야 성능 좋은 다양한 오디오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에 음악으로 들어가는 나의 유일한 출입구는 인켈 오디오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오디오와 함께다.

어릴 때 먹던 짜장면을 먹고, 어릴 때 들었던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다.

어릴 때 좋아하던 것들을 왜 다시 찾게 된 걸까.

내가 과거 지향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걸까.

엉뚱하지만 혹시 내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일 어릴 때의 것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려지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때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좋아하게 된 것이라면.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든 사람은 어린아이와 많이 닮아있다. 나이 든 이들은 약하고 느리다. 심지어 키도 작아진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 보호자가 필요하다. 나이 드는 게 아니라 다시 어려지는 것이 맞다면 우리 생은 어린이에서 다시 어린이가 되는 여정일 것이다. 노년이 다시 유년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을 더 많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아이가 돼보는 거다. 모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아이처럼 모르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궁금한 걸 참지 말고 묻기, 호기심과 상상력이 많았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 알고 싶어 하고 현실 너머를 그려보기,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를 가졌던 그때처럼 내일에 대한 부푼 마음으로 살아가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노인으로, 꿈을 꾸는 아비로 살아가고프다. 개구쟁이 할아버지로 늙고 싶다던 어릴 적 내 바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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