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해진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가까워졌다 싶다가도 거리감이 느껴져” 가끔 직장동료들한테 듣는 말이다. 대학시절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굉장히 활발했다. 소위 요즘 언어로 인싸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4개의 동아리와 학생회 등 각종 교내 활동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대외활동까지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경험했다. 나에게 주어진 아름답고 빛나는 4년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그러나 나는 곧 서러움이란 감정과 친해져야 했다. 회사라는 조직은 구성원 모두가 오빠, 언니, 동생이었던 동아리와 너무도 달랐다. 학교에서 막내란 모두가 챙겨주고 싶어하는 존재였다면 회사라는 조직에서 막내는 잡일을 기본이요, 찍소리 내지 않고 욕을 먹어야 하는 아무런 힘없는 존재였다. 이 작은 조직 안에서 업무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왜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변화된 주위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비슷한 나이의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기쁜 것도 잠시, 회사에서 만나는 인간관계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 힘들 다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보면 직장 내에서 친하다는 이유로 회사, 업무, 상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지만 잠시 시간을 두고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여러 사람들의 귀에 금세 들어가있다. 회사만큼 소문이 빠른 곳도 없을 것이다. 또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동료들과 욕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하는 부정적인 말들로 상대방을 되려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입사 초반 회사 내 비타민으로 불릴 만큼 밝았던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동료들과 관계는 유지하되 스스로 거리를 두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다른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사람들을 대하니 직급이 낮아도 가볍지 않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비밀이나 답답함을 토로하고 가는 상사와 동료들이 많아졌다.
한때, 회사 내에서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면 외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회사는 회사다. 인간관계가 그리우면 회사 밖에서 다양한 모임과 활동에 참여하며 허전함을 채우면 된다. 일하러 온 곳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묶여있기 때문에 오히려 적당한 거리감을 두는 것이 내 목소리를 쉽고 편하게 낼 수 있다. 회사 다니면서 사회생활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상사한테 아부하는 사람보단 동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현대인에게는 다양한 페르소나가 있다. 직장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나의 페르소나는 유쾌함을 세 스푼 정도 덜어낸 모습이다. 가끔은 이런 내가 심심하다고 느낀다. 실제 활발한 내 성격 앞에 놀라는 동료들의 모습을 가끔 상상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떤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던 내가 아닌 적은 없었다. 역할과 분위기에 따라 능동적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인간만이 주어진 특권은 아닐까. 중요한 건 어떤 모습의 페르소나이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아야 한다. 사적에서 활발한 나의 모습은 공적인 회사와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회사 내에서 편하지 않았다. 물렁한 모습을 보일 수록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기 보다는 이용하고 싶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회사이기 때문이다.
유쾌함은 없어도 현재 직장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나다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사람의 성격이 한 가지로 정의될 수있을까.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원래 인간의 본성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