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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 Oct 23. 2020

필름 1

아날로그를 사랑하세요?


얼마 전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구석에 처박혀있던 필름 여섯 통을 발견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오지 하며 보니 필름통 바깥에 몇몇 정보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2012년 여름, 2013년 제주도, 여행, 일상. 뭐 그런 식의 단어들이 인덱스에 적힌 채 붙어있었다. 그중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는 필름도 있었는데, 도대체 이게 언제 적 필름인가 싶어 현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좀 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쯤일 거다. 취미로 사진을 찍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 손에 니콘 FM2와 몇 개의 렌즈들이 들어오게 된 게.

나는 그전까지는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어느 날 어쩌다가 내 손에 오게 된 낡지만 관리가 무척 잘 된 필름 카메라 덕분에 사진에 관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사실 그 카메라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중1 무렵부터 줄곧 내 방 붙박이장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카메라의 주인이 공식적으로 나라고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맡겨놓은 짐 마냥 그 자리에 그렇게 방치되었다. 그러다 방 정리를 하면서 내가 꺼내 든 카메라는 내 것으로 명명되었다. 카메라의 오랜 주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우리 집에서 그 카메라를 탐 내는 사람도 없었다. 나도 사진에 썩 관심이 있진 않았지만, 그냥 멋있어 보였다. 당시의 나는 예술 분야라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경향이 있었기에 카메라가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 사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CA 특별활동 시간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학교에서 격주로 토요일마다 진행하던 특별활동. 나는 사진부를 선택했다. 사진 그거 그냥 셔터 누르면 되는 거 아니야? 하며 위풍당당하게 FM2를 들쳐 메고 간 첫날, 조리개니 감도니 초점이니 심도니 하는 것들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쓰던 카메라는 그냥 셔터만 누르니까 찍혔는데. 그건 자동이고 이건 수동이라 조작법이 다르다고? 수동은 뭐가 좋은 건데? 자동이 자동이니까 더 좋은 거 아냐? 왜 이렇게 좋아 보이는 카메라가 수동이지? 혼란스러움에 이론 수업이 지겨워질 무렵, 사진부 담당 선생님은 가져온 사진집 몇 권을 돌려 보라며 건네주셨다. 그리고 깨달았다. 상황에 따른 모든 기계적 환경을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순히 배경이 흐려진다는 것만으로 피사체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혹은 5초,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단 한 장, 한컷에 담아낸 다는 게 얼마나 황홀한지.

당장 셔터를 눌러보고 싶은 욕망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애석하게도 첫 수업은 이론뿐이었고, 다음 수업은 2주 후였다. 사진부 수업이 끝나고 나는 연신 필름 레버를 당기며 사진 찍는 시늉을 했다. 필름은 들어있지도 않았지만 뷰파인더 너머, 평행과 초점을 맞추기 위해 선이 그어진 그 세상이 그간 봐오던 세상과 달라 보였다.



색감만 봐도 코닥 필름임을 알 수 있다. 필름마다 고유의 색감이 있어서 사진의 분위기가 다름 점도 필름의 매력!
포근히 눈이 내리던 날, 학교 건물 입구에 있던 소파에 앉아서 동기들과 노닥거리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200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필름 카메라는 현상, 인화가 보통이었다. 컴퓨터의 보급화+핸드폰의 진화+디지털카메라의 보급화가 진행되면서 필름 카메라는 서서히 잊혀 갔지만,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감성파 사람들은 여전히 필름 현상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인화된 사진을 꺼내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갔다. 그러다 보니 필름 스캔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태국에서 찍은 사진 햇빛이 잎사귀를 통과해 잎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까지 담아냈다는 게 너무 좋다

나도 2006년 무렵부터는 필름 스캔을 이용했던 것 같다. 사진을 확인, 인화하기도 훨씬 용이했고, 코스트코에서 필름 스캔을 하면 한롤에 1500원 정도의 저렴한 값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 즐겨 썼었다.

고등학교에 가면서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필름 카메라를 좋아했고, 반드시 남기고 싶은 순간은 필름으로 기록했다. 대학에 가서는 DSLR과 토이 카메라를 사용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어느 무리에 가도 '찍사'가 되었다. 확실히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카메라에 접근했던 것 같긴 하다. 사진이 전공은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찍는 것을 좋아하니까 주변 사람들도 나 사진 찍어줘 라는 말을 하곤 했다.

결혼 후 호주로 가면서 필름 카메라는 아주 꽁꽁 봉인되었다. 여행 다니면서 절대 잊어본 적 없는 필름 카메라를 호주에 가면서 봉인시켜 버린 것은 아마도 필름 스캔이 어려워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잠시 필름의 매력을 잊어가던 차에, 여섯 통의 필름이 발견된 거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편 바우처를 끊으러 자주 가던 여행사 안에서 찍은 바깥 풍경

못해도 7~8년의 세월이 지난 것 같은 필름을 현상한다는 게 괜히 돈만 버리는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일주일 정도 이걸 그냥 버릴까 하는 고민을 했다. 인터넷에 10년 필름 현상 등의 키워드를 넣어 검색을 해보니 10년 넘은 필름을 현상했더니 색이 좀 바랜 것 같지만 어쨌든 현상은 되었다 하는 글을 봤다. 그 글에 희망을 얻고 어디에 필름 스캔을 맡겨볼까 검색했다. 동네 사진관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결과물이 불확실한 필름에 5000원 8000원씩 쓸 수 없었다. 검색 끝에 한 롤에 2000원 하는 사진관을 찾았고, 필름을 맡겼다.

결과물을 받아보는 데는 8시간 남짓 걸렸다. 세상이 좋아져서 스캔 파일도 핸드폰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필름은 두 달 정도 보관해준다고 했다. 스캔된 사진을 보니, 2002년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18년 전 사진이라니. 물론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사진은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둡게 찍혔다. 사실 결과물은 처참했다. (ㅋㅋㅋㅋ) 어둡고 색이 모두 날아간 탓에 어느 날에 찍은 것인지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 또 하나는 16년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18년 전 사진보다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들 모습과 풍경 사진들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래되어서 코닥 필름 특유의 색감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매력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추억을 끄집어내는 기분이었다.



태국 꼬 따오의 다이빙센터 화단인데 찍을 땐 몰랐는데 찍고 보니 어설프게나마 하트 모양 ♥



그 외에는 2011~2013년의 사진들이었다. 제주도 사진, 공원에서 친구들과 피크닉을 즐기던 사진, 태국 여행 사진, 임실에 치즈 먹으러 갔을 때(?)의 사진 등등... 오래된 필름을 현상한다는 게 이렇게 감성적인 일이었나. 그동안 숱하게 많은 필름을 현상해봤지만 기다림 끝에 얻은 소중한 한컷이라는 감상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다. 헌데 오래된 필름에서 그런 감정이 느껴진 거다. 반 이상은 날아갔지만 어쨌거나 내 기억의 조각들을 되찾은 느낌. 키 170cm, 몸무게 57kg의 내 몸 안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그 기억. 아니 정확히는 그 보다 훨씬 작은 내 뇌 안에 저장된 기억. 문득 내 안에 비집고 들어앉은 35년의 기억들을 버텨내는 내 몸뚱어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인간이 번아웃을 겪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그 긴 세월을 버텨 내다 보면 당연히 지치기 마련이니까. (지친다는 것에 창피와 수치를 느끼지 말아야겠다.)


필름을 찾고 나니 다시금 필름 카메라를 쓰고 싶어 졌다. 필름을 생산하는 회사가 줄어서 필름 값이 보통 비싼 게 아니던데, 오래된 필름을 현상했을 때의 행복을 느끼고 나니, 값진 순간을 영원으로 기록하기 위한 열정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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