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멈추기 어렵습니다
늦은 5월의 저녁이었습니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았고, 하루의 끝자락에 걸린 햇살이 잔잔하게 잎사귀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지쳐버린 날이었지요.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바람을 느껴보았습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옷깃을 스치는 기운, 그리고 그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제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루 종일 ‘멈추지 못하는 마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의미 없는 상념들까지. 머릿속은 늘 분주하고, 마음은 균형을 잃은 시소처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관성’이라 부릅니다. 관성이란, 물체가 현재의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이지요.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해서 움직이려 합니다.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상태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문득, 이 단순한 물리 법칙이 마음에도 닿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한 번 빠진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까요? 상처받은 말은 오래도록 마음을 붙잡고, 쓸쓸한 기분은 이유도 모른 채 되풀이됩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도 ‘마음의 관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정은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습니다. 분노는 더 큰 분노로 이어지고, 불안은 새로운 걱정을 불러오곤 합니다. 반대로 기쁨도 그렇습니다. 어떤 날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누군가의 배려 하나가 하루를 환하게 밝히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의 관성을 멈출 수 있을까요? 혹은 방향을 바꾸는 건 가능할까요?
나이가 들수록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의식적으로 멈추는 힘’의 소중함입니다. 젊을 땐 감정이 앞서고, 일마다 마음이 반응하느라 바빴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추는 것이 삶에 얼마나 큰 여백과 평화를 주는지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물체는 계속 움직이듯, 마음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대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외부의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짧은 산책, 조용한 음악, 차분한 호흡,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찻잔.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마음의 흐름을 천천히 바꾸어줍니다.
신경과학자들은 뇌는 자주 사용하는 회로를 강화한다고 말합니다. 걱정을 반복하면 걱정이 쉬워지고, 감사와 기쁨을 자주 느끼면 그것이 익숙해진다고 하지요.
결국 우리의 마음도 물리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익숙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성질, 그 속도를 조절해주는 작은 선택들, 그리고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외부의 힘.
오늘도 마음이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면, 잠시 멈춰보시는 건 어떨까요? 멀리 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어느 날 들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음은 관성처럼 한 번 멈추기 어렵지만, 방향은 분명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결국, 내가 만드는 것이겠지요.
늦봄의 저녁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합니다. 그렇게 마음도 조용히, 새로운 관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을요.
그건 어쩌면,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중년의 또 하나의 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