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앵두
어렸을 적, 여름이 시작되려던 6월이면 시골 이모댁에 가는 일이 참으로 기다려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설레던 순간은, 밭 끝에 서 있던 앵두나무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앵두들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붉고 작은 열매들은 어린 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곤 했습니다.
키가 작았던 저는 앵두 하나를 따기 위해 발돋움도 하고, 낮은 돌담에 올라서기도 했지요. 그렇게 애써 딴 앵두 한 줌을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꼭 작은 구슬처럼 반짝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붉고 통통한 걸 골라 입에 넣는 순간, 과육이 톡 하고 터지며 퍼지던 단맛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 달콤함은 설탕보다 더 깊고, 자연이 천천히 준비해온 고요한 맛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앵두의 달콤함도 자연이 짜놓은 과학의 섭리 덕분이었습니다. 앵두나무는 햇빛을 받아 잎에서 광합성을 일으키고, 그 에너지로 만들어진 당분을 열매 속으로 천천히 모읍니다. 햇살이 좋은 날이 이어질수록 열매에 당이 더 많이 쌓이고, 그렇게 앵두는 점점 더 달콤하게 익어갑니다. 이모가 “햇살을 좀 더 먹어야 진짜 달아진다”던 말은, 단지 정겨운 농담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담고 있었던 셈이지요.
익어가는 앵두의 붉은빛 역시 그저 보기 좋은 색만은 아니었습니다. 식물이 자신이 충분히 익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만드는 색소, ‘안토시아닌’ 덕분이지요. 동물이나 사람에게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라고 말하듯, 자연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런 과학을 몰랐습니다. 그저 “이모댁 앵두는 유난히 맛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그 단맛은 앵두 그 자체의 당도뿐 아니라, 그 열매를 둘러싼 모든 기억들이 더해진 맛이었던 것 같습니다. 흙냄새, 땀 흘리며 일하던 밭고랑, 그리고 “많이 따먹어라” 하시던 이모의 웃음.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녹아 있었기에 그렇게 달게 느껴졌겠지요.
지금은 그 앵두나무도, 이모댁의 밭도 많이 달라졌지만, 어느 해 6월 시장에서 우연히 앵두를 보게 되면 저는 잠시 멈춰섭니다. 그 작은 열매 하나가 문득 기억의 문을 열고, 잊고 지냈던 여름의 공기와 햇살이 다시 제 곁을 스칩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단맛과 함께, 저는 다시 밭 끝 그 앵두나무 아래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자연은 언제나 같은 리듬으로 계절을 만들고, 열매를 익히고, 기억을 불러옵니다. 앵두 한 알 속에도 그런 조용한 질서와 순환이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앵두처럼 제 계절이 되면 서서히 익어가고, 붉게 물들고, 어느 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달콤하게 남게 되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