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레딩거의 신, 삶과 죽음의 동시성을 우리는 신에게 부여해왔다.
Gott ist tot.
신은 죽었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고 영혼불멸을 입증해주는 준거이다. 영혼조차도 불멸한 것인데 그것을 증거 해주는 신이 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Gott ist tot'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처음 한 말은 아니었지만, 니체는 이 말을 통해 신의 지위를 박탈했다. 신은 니체 전까지만 해도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으며, 척도였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하는 존재였다.
나의 영혼은 이데아계로 돌아간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갚아주게나"라고 유언을 남겼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데아계에 있는 영혼이 육체에 깃드는 것이 삶인 것에 반하여 죽음은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독약을 먹고 죽을 수 있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니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영혼불멸설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거쳐 모든 것을 양분(兩分)하는 기준이 되었다. 기독교 사상은 이것을 받아들여 영혼과 육체,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믿음과 불신, 도덕과 부덕의 온갖 장치를 교리에 심어놓았다. 전자는 좋은 것, 후자는 나쁜 것으로 규정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신에게 죽음을 선물했다.
이런 모든 기준에 신이 있었다. 신은 모든 것을 재단하는 척도였고, 그리스 철학의 이데아는 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절대적인 존재의 품 안에서 살아왔다. 이런 존재에게 니체는 죽음을 선물했다. 섞여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하나로 합해진 것이다.
신 앞에서! 그러나 신은 이미 죽었다. 그대, 보다 높은 사람이여! 이 신은 그대들에게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신이 무덤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그대들은 비로소 부활했던 것이다. 이제 위대한 대낮이 다가온다. 이제야 비로소 보다 높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중략)
자! 그대, 보다 높은 사람이여! 지금이야말로 인간의 미래의 산이 진통을 시작하리라.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위버멘쉬; Ubermensch, overman)이 태어나기를 바란다.
프리드리히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
어쩌면 신은 이미 죽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니체가 공공연하게 그것도 여러 번 신이 죽었음을 고하였지만, 어쩌면 기독교 세계의 신은 이미 죽어있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불경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 경전에 따르면 신은 크게 세 가지 단계 상(phase)을 가진다. 구약의 신은 다른 신들보다 조금 나은, 남녀를 극도로 차별하는, 게다가 질투심까지 엄청난 인격신이다. 그는 인격신의 프로토 타입으로 자신의 자그마한 부족만을 생각하는 지역 신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민족이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 엄청난 재앙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곧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조리 치셨다.
탈출기 12:29
질투심이 강한 존재에게 공짜가 있을 리 없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
탈출기 13:1-2
예수라는 뛰어난 선지자는 이런 인격신에게 첫 번째 사망 선고를 내린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신의 모든 인격적 부분을 배제하였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실천적 행동지침을 설파한다. 후대의 제자나 성인이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윤색된 부분을 걷어낸다면 예수가 말한 '하느님'은 '자연법칙'이나 '세상의 이치' 정도로 대체해도 큰 무리가 없다. 예수의 사상과 삶은 통째로 종교인들에 의해 이용당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오 복음서 5:44-45
위의 그분 대신 자연법칙이나 세상의 이치를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육체는 천한 것, 영혼은 고귀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내세의 삶이 중요하니 현세의 삶은 내세를 위한 전 단계나 디딤돌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현재의 삶에 대한 지침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마태오 복음서 6:25
그렇다. 목숨이 중요하고, 몸Mom이 중요하다. 훗날 신학자들에 의해 목숨과 몸이 형이상학, 영혼, 불멸의 것으로, 오히려 음식과 옷이 형이하학, 육체, 유한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목숨을 다른 것으로, 그리고 또 다른 것을 목숨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목숨은 목숨이고, 몸은 몸이다. 철저하게 현실적인 가르침이고, 지극히도 현세 중심적인 지침이다. 예수에 대한 온갖 누더기 같은 케리그마kerygma를 걷어 내고 보면 현생에서 그의 마지막 말이 더 크게 와닿는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영혼이 불멸하고 언젠가 필멸할 몸이 중요하지 않다면, 게다가 하느님의 권좌 옆자리가 그렇게 소중하고 좋은 곳이라면 죽음의 순간에 기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그의 처절한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라. 몸Mom과 목숨의 중요함에 대한 절규라고 왜 느끼지 못하는가.
한 번 소실되었던 신의 인격은 바오로 이후 서양 신학자들에 의해 부활했다. 유대 혈통이지만 로마 시민이었던 바오로는 예수의 가르침 중 정수만을 뽑아 그리스, 로마의 정신인 소크라테스의 이분법적 사고를 채색해버렸다. 색깔이 칠해진 신의 모습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온화하기도 했다. 실망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다만 구약의 신과 다른 점이라면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유대인에서 이방인까지 확대되었으며, 상벌의 시기가 현세에서 내세까지 확장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18
바오로는 예수의 가르침이라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삶이 중요하고 목숨이 중요하고 몸이 중요한 예수의 가르침을 비틀어 몸Mom에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였고, 육체를 죽음, 불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육체야말로 생명의 증거이자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육이 죽음이라니. 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성령이 생명이라니. 현생에 박해를 받는 민초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달콤한 역설이었겠는지 생각해보라.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3-7
Die Religion ist das Opium des Volks.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사디즘의 어원이 된 자) 후작의 표현을 잘 이용하여 카를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바오로의 달콤한 역설을 담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다. 일시적이고 더러운 육체가 사는 현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다가오는 영혼불멸의 세상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면 당장의 고통은 감내 가능한 것이 되었다. 불평등을 참으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지만 앞으로 올 불멸의 권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꼭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니체는 기어이 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분법적인 사고를 버렸다. 하지만 꼭 신을 죽여야만 했을까? 좀 더 우아한 방법은 없었을까? 아니. 니체보다 일찍 훨씬 더 우아한 방법으로 서양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경계하고 수직적 세계관에서 수평적 세계관으로의 혁명을 설파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수운 최제우(1824-1864)는 영혼과 형이상학을 박멸하는 방법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본디 몸Mom으로 하나이고, 하느님이 내 안에 있다는 방법으로 이분법적 세계관을 부수려고 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그리고 네 안에 있으니 모두가 평등하다.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곧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약간 어떻게 공부 좀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의 출신을 살피고 가세를 형량 하여 아양을 떨면서 하는 말이, "아무개는 지벌도 좋거니와 문필 또한 유려하니 도덕군자가 분명하다"하면서 몰염치를 무릅쓰고 떠받들고 높이곤 하니 곡학아세 하는 꼴이 참으로 가관 아니겠소? 우습다. 저 인간은 지벌이 무엇이길래 군자 됨의 근거로 삼으며, 문필이 무엇이길래 도덕을 운운하는고.
(중략)
그러나 하느님은 그 마음이 항상 지공무사하시다. 하느님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을 완전히 갈라내어 취하고 버리고 하시지 않으신다.
용담유사(1863), 수운 최제우, 도올 김용옥 역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의 가르침은 이를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베를 누가 짜고 있으냐?"
"제 며느리가 짜고 있습니다."
"아니다! 하느님께서 짜고 계시나니라."
"제사상은 청수 한 그릇으로 족하니라. 청수 한 그릇이야말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 역 용담유사를 읽는 내내 느낀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대한민국만의 K-철학이 있는데 우리는 왜 이것을 배우지 않나?' 신의 힘까지 빌려서 남에게 보복하고 저주를 내리고 맏아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유대의 역사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그 민족의 목표와 사명으로 삼는 우리 역사 중 지금 우리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어느 것인가? 우리 민족은 이미 충분히 훌륭했다. 이 정도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