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목소리는 까맣게 잊었고요즘 목소리는 짐작도 되지 않을 때 해를 만났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동창은 아니었지만가장 궁금한 동창이긴 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앞에서 노래하거나 춤추는 데 주저함이 없던 아이. 반장이거나, 사생 대회 입상자거나, 축구 선수거나, 반에서 제일 글씨를 잘 쓰던 아이였으니까.
버스에서 내리기 전, 창밖에 있는 해를 발견했다. 횡단보도 맞은편만큼 먼 거리였고 얼굴의 윤곽이 변할 만큼 긴 세월이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단출한 차림에 손에는 잡지를 말아 쥐고 있었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얇고 매끄러운 잡지 표지가 말려서 생긴 동그라미 안으로 살짝 보였다.
진한 눈썹과 낮지도 높지도 않은 콧날이 그대로였다. 살짝 그을린 피부가 계절에 어울렸다. 많이 변했을까 봐 두근거리던 마음이 진정되자, 이번엔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매일의 나는 그대로지만 몇 해가 지난 다음의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일 수 있으니까. 세포도, 생각도, 웃음소리도.
그대로다 넌.
진짜 그대로란 뜻이 아니라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단 말인 걸 알면서도 한숨 대신 다른 게 떠올랐다. 알고는 있었다, 한 사람의 성격과 취향이 하나의 색으로 완성될 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걸. 모든 게 말랑말랑하던 시절을 함께 지나온 사람한테는 어떤 모습이든 굳어 버린 형태가 낯설 거라는 걸.
걸었다. 긴장이 풀릴 만큼만 걸을 생각이었는데, 마주앉아 얼굴을 볼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나서 어디들어가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날씨가 좋다는 핑계로 도시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해도 옆에서 박자를 맞췄다. 언제부터 어색해졌을까. 같은 반이던 이태의 절반정도는 사이좋은짝꿍이었고, 만난 후론 해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았고, 생일엔 서로의 집에 초대하던 사이였는데. 길에서 해의 어머니를 만나면, 언제나 이름을 부르며 용돈을 주셨다.받아도 되나 싶어 우물쭈물하면 우리 해랑 잘 지내는 게 예뻐서 그래, 덧붙이며 웃으셨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수박의 붉은 부분에 입술이 닿을 때처럼 시원한 미소였다.
밥때가 한참 지나서 뭔가 먹긴 해야 했는데, 뭘 먹어도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해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찾았는지 듣느라 긴 시간이 지나 있었고,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지만 우리는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배고팠지?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고 들어간 식당에서 해가 물었다. 우린 묵묵히 밥그릇에 고개를 묻고 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헤어졌다. 알아도 달라질 게 없는 건 물을 필요가 없단 걸 알 만한 나이가 된 건지도 몰랐다.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하겠다며 다른 나라로 해가 떠난 적이 있다. 거기 날씨가 어떤지,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 얼마나 괴짜인지 알려주는 전화가 드문드문 걸려 왔다. 하루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뜸을 들이다 안 해서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랬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잊으러 온 거야.
뭘, 혹은 누구를... 나올 뻔한 말을 삼켰다. 잊으려 애쓰는 걸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멈칫했다 못 들은 것처럼 다음 화제로 넘어가깔깔대는 동안웃음만이 시차가 있는 이들을 같은 시간대에 담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모른 척했던 말들인데.
돌아온 해를 만난 날, 만두를 먹다 물었다. 잘 잊고 왔냐고. 해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길에 버려진 트리 같은 표정으로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멀리 가니까 더 그립더라.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다 쓰러진 날,해가 데리러 왔다. 버스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염없이 길었다. 아플 때는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도 따갑게 느껴지니까.
햇빛이 너무... 뜨거워.
해가 작게 접어 가지고 다니던 우산을 펼쳤다. 후덥지근한 내부에 그늘이 생겼다. 공중을 떠도는 먼지도 길을 잃은 한낮의 버스,승객은 우리뿐이었다. 괴괴한 공기가뜨뜻하고 나른했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길을 달리던 버스가어지러워 우쭐댔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기운이 없었지만 침묵으로 채우기엔 먼 길이었다. 우산 손잡이를 꼭 붙들고 있는 해 옆에서 힘없이 눈을 감았다. 연노랑과 빨강으로 물든 빛이, 감은 눈 앞에서 아른거리다 풀려나는 게 느껴졌다. 그때,
부스럭거리며 한 손으로 가방에서 노트를 꺼낸 해가 직접 쓴 시를 읽기 시작했다. 가만한 목소리 뒤로 열한 살의 어느 날이 어슴푸레하게떠올랐다. 아무리 수줍은 사람도 인생 최초의 주목을 피할 수 없어 화살표가 되는 날. 교실 문이 열리고 전학생이들어섰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잠자코 따라가는 눈이 틈새로 슬쩍 보였다. 금세 사라졌다. 해를 닮은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