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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un 06. 2023

가만한 감당  

연극 <원 테이블 식당>


그날, 대학로에서 최순우 옛집까지 는 동안 고요한 샛길을 자주 만났어요. 꼬불꼬불한 골목과 가파른 계단을 지나, 침착한 고양이 만나 화들짝 놀라 나서, 새로 문 연 식당 전단지도 한 장 받았죠. 꼭 와주세요-란 말엔 그럴게요, 대답까지 했어요. 숨이 찼지만, 어깨에서도 땀이 솟는지 자꾸 미끄러지는 가방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지만, 약속 장소에 당신이 이미 와 있는 걸 알아서 속도를 늦출 수 없었어요. 그늘에서 책을 읽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걸 간간이 찍으며, 뛰어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거기 있어서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선 소극장 앞을 지나며 생각했어요. 어쩌면 오늘, 빈자리에 가구를 들이마음에 들일, 묵직한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도착해 숨을 고르 옛집의 작은 뒤뜰에 오붓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픈 배를 쓸어 주는 손처럼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바람이었어요.


함께 먹은 것들만큼, 함께 먹지 못한 것도 기억해요. 주인공이 파전을 작게 잘라 관객들한테 나눠줬을 때의 일이요. 두 번째 줄 앉아있어  받을 줄 알았는데 배우가 갑자기 팔을 뻗어 우리 으로 접시를 내밀었. 당신이 재빨리 한 조각을 집어 제 손에 쥐어 줬습니다.


새우깡 맛이 나는 파전은 처음이었어요. 바다에서 난 것과 밭에서 난 것이 반죽 속에서 한바탕 섞여 항구의 여름밤처럼 반짝이다 멀어지는 맛이었죠. 파전이 꽂혀 있던 이쑤시개를 주머니에 넣지도, 바닥에 버리지도 못 쩔쩔매며 들고 있다 생각했어요. 이쑤시개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나, 혼자 먹어 미안한 마음에 무게가 실린 것처럼...


주인공 중 한 명이 가족을 잃은 순간, 공중을 감싼 연한 어둠이 가까운 어둠을 차례로 삼키며 진해지는 동안, 처연함이 눈부셔 눈을 감았습니다. 어깨와 팔을 차례로 짚 마침내 찾던 걸 은 보드라운 손이, 다른 손을 꼭 움켜쥐었어요. 따뜻하고 담숙한 손이었어요. 만나자마자 당신이 보여준 손.


손을 찍은 사진을 많이 갖고 있어요. 사진 찍기 싫어하는 당신이 유일하게 허락한 게 손이어서요. 컵에 물을 따르는 손, 책 위에 얹은 손, 테이블 위에서 잠자는 것 같은 손, 내 쪽으로 뻗은 손, 걸을 때 느리게 흔들리는 손, 이름을 가르쳐주려고 가지 끝을 가리킨 손, 커피잔을 감싸거나 가락을 쥐고 생각에 잠긴 손, 그리고... 길을 걷다 불쑥


난 아무하고도 손 안 잡아,

이러는 거 처음이야.

말해서 기어이 다른 손을 울리는 손.


극 초반의 경쾌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슬픔의 동굴 속으로 들어갈 땐 당황했어요. 어둑하고 서늘해서 흰 종이 인형이 잘 보이긴 했지만요. 모든 시계가 멈출 때까지 누워 있던 인형이 일어났을 때, 마침내 밖으로 나갈 결심을 했을 때, 고개를 돌려 당신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어요.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당신 옆에서 왜 손수건이 없을 때만 눈물이 날까, 생각하며 손등으로 열심히 눈을 문질렀습니다.


원 테이블 식당에 가본 적 없어요. 손님이 원하는 걸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식당 이야기는 가끔 들었죠. 드라마 '심야 식당' 같은 거요. 그거 먹고 싶어, 만들어 줘, 말할 사람이 없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 거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래 울다, 가끔 스타카토웃으이야기에 빠져드는 동안 우리가 눈여겨본 사람은 달랐습니다. 당신은 보살피는 사람을, 저는 보살핌을 받는 사람을 아프게 바라봤죠. 그쪽을 아프게 본 건,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 남겨진 사람의 마음은 어떤 걸까 내내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보살피는 사람은 사랑도 친구도 많아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 과거와 결별하고 떠잖아요.


먹는 얘기라면 말로든 글로든 끝없이 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세대와 성별, 하는 일과 취미가 달라도 음식에 관해누구나 일가견이 있죠. 모든 게 다른 둘이어도 좋아하는 요한 그릇이 같은 테이블에 앉 수 있요. 나눠 먹고, 먹는 걸 지켜보고, 입에 넣어주고, 더 먹으라고 말하며 흐뭇해할 때, 먹는 행위가 사이를 얼마나 끈끈하게 만드는 지 무수히 목격한 것처럼요.


난 누구랑 같이 밥을 못 먹어. 먹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어. 그날, 콩(저를 가리키는 애칭입니다.) 북토크 날도, 모르는 사람들이랑 밥 먹을 자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난 거야. 콩이 나만 챙길 수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것도 싫었거든.


몰랐어요. 우린 언제나 둘이 먹기엔 차고 넘칠  양을 주문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한 테이블들 떠올어요. 행주가 지나간 물자국이 있는 청량한 테이블 앞에 앉던 순간, 젓가락을 꼭 쥐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단 비장한 결심을 하던 순간, 같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습니다. 펄떡이는 삶이 거기 있어요. 위로처럼 가만한 젓가락에, 남몰래 연두색 이쑤시개를 꼭 쥐어 보던 손바닥에, 널 두고는 아무 데도 안 다고 말하는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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