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모습
시인 황동규(黃東奎)씨는 1938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고, 서울대, 에딘버러대, 아이오와대, 뉴욕대 등에서 수학했다.
고도의 지성과 세련된 감수성을 상상력 속에 용해시켜 정열적인 시를 빚는 이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확고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으며, 제5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그의 시작(時作) 20년의 기념적 징표가 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황동규 ——우리의 모습
목차
1. 어둠에 대하여
2. 긴장과 절제에 대하여
3. 우리의 모습
<시선, 그리고 시선> 1편에서 다루게 된 시집,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시인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입니다.
어둠이 다르게 덮여오는군요. 요샌 어둡지 않아도 오늘처럼 어둡습니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들」 중에서
내 주변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때. 솔직히 말해, 몇몇 고통은 공감되지 않았다.——그게 과연 힘든 일일까, 하는 의문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몇몇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을 겪어왔음에도 당신은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고 있다.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질 만큼의 환한 미소로.
나는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하찮은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늘 깨어내야 한다. 저마다 "어둠은 다르게 덮여"오고, "요샌 어둡지 않아도" 순간의 기억으로 오늘처럼 어두울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깨어내야 했다.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
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지붕에 오르기」 중에서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당신의 아픔을 자꾸 건드리려 했던 때가 떠오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고통을 디디고 있었던 때를. (삐걱거리는 소리) 그때 당신의 기분을 감히 상상하려 한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당했던 당신에게 나는 가정의 화목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혐오스러웠을까. 이 와중에도 나는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따지고 있는 인간이다. 안타깝다. 그때 당시를 되돌아보면, 내가 당신의 고통을 마루처럼 디뎌대는 순간들은 대개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지 못할까 봐 두려워, 자꾸 그 얘기——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야,라는 식의 얘기——를 꺼내어 수습하려 들었음을. 그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든다는 것은 큰 욕심이자, 죄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어둠'은 섣불리 내뱉은 말로부터 시작되었다.
부끄러워라.
문패와 아이들이 붙어 있는 집을 잊고
총 들고 아라한이 된 자들, 그들의 탈속(脫俗)을 밀고
털도 밀고 털과 함께 인연도 밀고
다도해(多島海), 생선들이 멋모르고 뛰는,
낮과 밤이 주책없이 섞이는,
다도해 섬들 사이로 아조아조 숨어
발동선 밑창에 네 발 깔고 엎드려
사흘 밤 사흘 낮을 소주로 내장(內臟) 깨끗이 씻고,
아슬아슬하게 간지러운
이백여 점 뼈도 시리도록 씻고,
이 악물고
마지막 남은 마음도 쏟아버리고,
갑판에 꿇어 엎드린 생(生)의 빈 찰나에
한두 마디씩 내리는 성긴 눈발
가죽과 발바닥을 식히는 이 싸늘함.
그 한두 마디를 비명처럼 열고 들어가
깨어 있자 깨어 있자 되뇌이며
우리 사는 집 위로 떨며 내린다.
아이들이 불현듯 울지 않고 잠드는
밤에도 내리고
불 끈 갈현동에도 남가좌동에도
부끄러워 구석에 세워둔
꿈에도 내린다.
——「성긴 눈 —김병익에게」 중에서
"부끄러워라."로 시작되는 시, 「성긴 눈」
"섬들 사이로 아조아조 숨"고, "네 발 깔고 엎드려", "소주로 내장을 깨끗이 씻고", "이백여 점 뼈도 시리도록 씻고", "이 악물고 마지막 남은 마음도 쏟아버리"는 시적 대상은 "한두 마디씩 내리는 성긴 눈발"을 맞는다. 아아, 부끄러워라. 성긴 눈발은 한두 마디씩 내린다. 그 한두 마디는 "비명처럼 열고 들어가/깨어 있자 깨어 있자 되뇌"인다. 한두 마디의 성긴 눈발은 실제 공간인 "갈현동에도 남가좌동에도" 내리고, 관념적 공간인 "꿈에도" 역시 내리고 있다. 실제와 관념을 넘나들며 화자에게 내리며,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시인 황동규의 시를 이리 표현했다.
황동규(黃東奎)는 방법론적 긴장의 시인이다. 긴장된 자기를 확인하기 위해 긴장하지 않은 자기를 회의하고 비판하고, 긴장하지 않은 자기를 버리기 위해 긴장된 자기를 일깨운다. 긴장은 그의 시작(時作)의 감추어진 원리이다. 삶에 있어서는 자신을 망가뜨리려는 모든 것과 싸우고, 글쓰기에 있어서는 절제를 얻기 위해 자신을 과격한 모더니스트나 치졸한 감상주의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싸우고, 그리고 삶이 글쓰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긴장한다.
——「시와 방법론적 긴장」 중에서, 김현
여기서의 "긴장"이 그의 시 중 「성긴 눈」에서는 "한두 마디씩 내리는 성긴 눈발"일 것이다.
시인은 "부끄러워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서일 수도 있겠으나,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으려 자기 자신을 비판하려 드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부끄러워라" 다음으로 나오는 말들은 부끄러운 이유에 대한 열거가 아니라, 자신의 어느 부분은 "씻"거나, 성긴 눈발을 "한두 마디"라고 표현함과 동시에 그 한두 마디 말은 "깨어 있자 깨어 있자"라고 되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인의 시를 보며 감탄했던 부분은 과연 이러한 부분이다. 만약 여기서 "절제"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자꾸 의문하게 된다.
나도 나 스스로 "절제", 혹은 "긴장"한답시고 글을 쓸 때가 많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작용된 적은 없다. 주변인들이 내 글을 보곤 위로나 조언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러하다. 나의 글이 그들에게 '막연한 삶에 대한 회의'로 비친 것일까? 글에 어떠한 회복의 기미도 없고, 부정적 감정들을 열거하는 식의 글쓰기가 이루어진다면, 누가 그런 부정적인 글들을 찾아서 보겠는가. 나와 같은 경우에도, 주변인들의 글을 볼 때면——보통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말한다——매번 그 마음들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 글 초반에서 다루었다시피 고통을 저울질하는 인간이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근데 나 역시 똑같은 글을 쓰며, 남들에게 내가 의도한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감정의 "절제"나 내 모난 모습에 대한 "긴장" 상태가 온전히 이루어진 글쓰기는 과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한 글을 추구하는 까닭은 읽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게 구체적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생각해서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나의 아픔을 말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다면, 감정적이기보다, 절제된 감정으로 구체적인 사실만 깔끔히 전달하여, 상대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는 언젠가, 혹은 어차피가 중요한 키워드이지 않을까, 싶다. 살아가다 보면, 쉬운 예시로 연애를 하며, 연애가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결국에 다른 사람이 만나서 서로 다른 부분을 맞춰가는 과정이다 보니, 그 안에 서러움이 없을 수 없다. 그 서러움을 자각하게 되면, 그 서러움이 연인에게 전도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혹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역시 든다. 영원히 말하지 않음을 통해 혼자 짊어질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한다. 언젠가 결국 고백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말하게 된다면, 타이밍이나 언동에 대해서 고뇌하는 방안으로 선로를 트는 것이다. 사실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고백하는 행위에서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헛된 욕망일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하더라도 그 불가능과 가까운 상태라도 되기 위해선 "긴장"과 "절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눈'에 관한 시를 더 살펴보면,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조그만 사랑 노래」 중에서
하지만 성긴 눈이 늘 시인에게 닿는 것은 아니다. 눈이 "한없이 떠다"닐 때도 있는 것이다.
그 눈은 차가워서 그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운다. 그 부딪침은 그러나 지속적인 것이 아니고 불현듯 얻어지는 것이다. 그 불현듯 얻어지는 각성의 상태는 그의 마비를 더욱 두텁게, 뚫고 들어가기 힘든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 점이 그의 시의 힘의 근원을 이루는데, 왜냐하면 우리도 또한 언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고양된 상태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우리 역시 깊은 마비 상태에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한다.
——「시와 방법론적 긴장」 중에서, 김현
"그 부딪침은 그러나 지속적인 것이 아니고 불현듯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김현은 말한다. 성긴 눈이 매번 시인에게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내 부정적 감정이 당신에게 전도되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휘몰아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부정적 감정이 당신에게 넘어가 있을 때가 많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과 전혀 상관없던 다른 상대와의 말다툼으로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긴장"이 유지된다면 웃는 얼굴로 당신을 대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말다툼의 시기나 정도, 다른 사건들의 유무에 따라 "긴장" 상태가 풀어져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게 되고, 말투가 딱딱해져 부정적 감정이 당신에게 전도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는 우리 역시 깊은 마비 상태에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한다."
창밖에선 매맞지 않는 눈이 내리고 있지. 낮에 들여논 난(蘭)이 고개 숙였어. 일생을 다 합쳐도 돌아누워 오래 말없는 네 등의 끝없는 공백을 다 메울 수 없을 것 같구나. 흰 머리카락 몇 오리가 곤두서서 너도 잠 이루지 못함을 알리고 있다. 우리의 모든 과거에 어둠이 내리고, 어둠 속을 복수(複數)로 웃는, 웃다웃다 떨어지는 눈발이 내리고 있다. 수백 명 사내와 함께 누운 것처럼 잠도 방황도 시작되지 않는구나. 오래 놀던 새 갑자기 사라지듯 우리 다시 태어나지 않을 모든 마을은 온통 허황하고 슬프리라.
——「낙백(落魄)한 친구와 잠을 자며」 전문
잠을 못 이루는 지금이 너무 괴롭다고, 당신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그 새벽에 눈을 감고 어디를 떠다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진 않았다. 그곳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나는 모른다. 본인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단지 당신은 괴롭다고 말할 뿐이다. 그때의 "끝없는 공백"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때 당시 당신과 같은 공간에서 잠 이루진 않았지만, "잠도 방황도 시작되지 않는" 이불 훔친 당신의 등은, 머릿속에서 쉽게 그려낼 수 있었다. 나도 밤에 생각이 너무 많아져, 생각하는 것이 지쳐질 때 잠들기 일쑤였으니까.
당신은 단지 공허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것은 분명하다는 듯, 당신의 말투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가는
삶의 몽땅,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꿈, 견디기 힘든」 중에서
이것은 당신과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가는/삶의 몽땅, 쌓아도 무너지고/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말도, 꿈이라고 일러두고 싶다. 평범하게 누구 밑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싶은 것도 꿈이다. 사랑에 서러움 없었음, 하는 것도 꿈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재질의 꿈들을 지니고 있다.
발을 굴러도 마루가 삐걱대지 않는다.
소리가 더 깊이 들어갔을까
더 깊은 데, 우리가 자갈처럼 가라앉아
더 이상 남이 될 수 없는 데.
——「지붕에 오르기」 중에서
나이 들수록 삐걱대는 소리는 줄어든다. 그 '줄어듬'은 '사라짐'이 아니라 "깊이 들"어감이다. 고통을 곧 마루라고 하여 마루를 고쳐서 "삐걱대지 않"지만, 그것은 "소리가 더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어른들의 가짜 미소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남편과 개판 싸우고 온(우연한 목격이어야 한다. 당신은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이 0.1초 만에 내게 미소 짓는 모습만 보아도 다 알 수 있다. 아니, 모른다. 모르는 것이다. 나는 목격자일 뿐, 당사자가 아니라 모를 감정이다.
그런 와중에 밑에 시는 나에게 큰 위안을 준다.
3
또 비탈! 눈 자갈이 튀고 그가 쓰러지고 나도 쓰러졌다. 자전거는 밭에 들어가 돌고 있었다. 수수 그루터기마다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눈이 녹고 있었다. 그를 일으켜 세우며 바다 냄새를 맡았다. 그의 흰 옷엔 피가 배어 있었다. 어떤 꽃무늬보다도 눈이 부신, 허리에 크게 번지는 꽃. 또 비탈! 자갈이 튀고 우리는 다시 쓰러졌다. 그가 나를 일으켜주었다. 내 옷에도 피가 배었다. 신기했다. 내 몸에서도 바다 냄새가 났다. 우리 자전거는 나란히 달렸다. 서로 살필 필요가 없이.
——「바다로 가는 자전거들」 중에서
비탈에서 "그가 쓰러지고 나도 쓰러"지듯, 나와 당신과 우리가 쓰러진다. 현실을 살아가며 쓰러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당신을 "일으켜 세우며 바다 냄새를 맡았"고, 당신의 "흰 옷엔 피가 배어"있음을 알게 된다. 당신에게 먼저 어둠이 드리웠는데, 내 눈에는 "어떤 꽃무늬보다도 눈이 부신" 꽃처럼 보인다. 그러다 "또 비탈", "우리는 다시 쓰러졌다."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일으켜주었다." 이젠 나에게도 어둠이 드리웠고, "내 옷에도 피가 배었다. 신기했다. 내 몸에서도 바다 냄새가 났다." 당신처럼.
내 주변에 낙백한 당신이 있고, 꿈 견디기 힘들어하는 내가 있고, 고통에 삐걱대는 소리 깊이 들어간 우리가 있다. 불완전한 존재들. 근데 우리는 그런 서로에게 손길을 내미는 찰나가 있다. 낙백한 당신이 내게 괴로움을 고백할 때, 나는 당신에게 "나는 네 편이야"라고 손길을 내밀었고, 꿈 견디기 힘들어 감정에 휘둘리는 나를 보며 "저는 당신의 글이 좋아요."라고 말해준 당신이 있으며, 남에게 내 감정 전도될까 미안하고, 두려워 고통의 소리 내놓지 않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표정을 더 살피며, 별일 없지, 안부 묻는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나란히 달렸다. 서로 살필 필요가 없이."
찰나일지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어둠이 언제라도 드리울 수 있는 현실에서 긴장과 절제가 늘 지속될 순 없지만, '시'의 매력은 그 틈으로 꽃 피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시'라는 공간에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위한 번뇌의 흔적들을 보며,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도 덤비는 그 몸부림. 나는 그 몸부림에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