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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림 Mar 17. 2022

편애의 대물림 - ②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너는 시대를 잘 타고났으니 자신의 처지보다 훨씬 낫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위로 오빠들이 있었으며 아래로도 동생들이 있었던 엄마는 오빠들이 대학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중학교만 나왔다. 고등학교 못 가게 하자 엄마는 몇 달을 서러워서 울었다고 다. 공부를 잘했지만 딸은 많이 배워봤자 쓸데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땐 시장에 물건을 팔아야 했고, 외할머니가 동생들을 줄줄이 낳아서 그들을 키워야 했다. 마땅히 집안일도 엄마의 몫이었다. 단을 맞을 때는 주로 집 밖으로 쫓겨나 혼자 울음을 삼켰다. 외할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고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너를 굶기기를 했냐, 너를 버리기를 했냐', '너는 그래도 나보다 낫다, 너는 그래도 ...하다', '저것은 성질이 까칠하고 나빠'라는 말을 외할머니에게 주로 듣고 살았다. 행여 문지방이라도 밟으면 '쟤는 등치만 컸지, 조심성이 없어', '저것의 발을 잘라버려야겠다'는 식의 폭언 또한 자주 들었으며, 오빠와 남동생 위주로 돌아가는 집안의 대소사에 발언권조차 크게 없었다. 집안의 우선권은 오빠들과 남동생에게 있었고 모든 애정과 관심은 조카들에게 돌아갔다. 마는 스스로 자라야 했고 어떤 감정이 생기든 혼자 삭여야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외할머니는 참기름 한 병을 기꺼이 챙겨주지 않았고 친정에 들리면 집안의 허드레 일은 여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임신 중에 친정식구의 관심과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했고 나를 낳고도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출산 며칠 만에 빨래를 하러 냇가를 나갔으며 몸조리도 못했다. 미역국도 스스로 끓여 먹었다. 젖몸살이 심해서 피가 나와도 혼자 울면서 젖을 먹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속을 받지 못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엄마는 한 번도 들을 원망하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그 시절 얼마나 깨어있는 사람이었는지 너는 모르지? 아들뿐만 아니라 며느리한테도 땅을 줬어. 얼마나 현명하셨니"


엄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래도 네가 있어 든든했다'라고 한 말을 꼭 훈장처럼 소중히 여겼다.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엄마는 감정을 꿀꺽 삼켜버린 사람 같았다. 내 앞에서는 잘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리 어려도 나를 안아주고 다독일 줄 몰랐고, 야단을 칠 땐 으레 밖으로 쫓아냈다. 나는 자주 내복 바람으로, 혹은 맨발로 집 밖을 나가울어야 했다. 


엄마는 자기처럼 나 또한 스스로 크길 바랬다. 라서 어떤 일들을 의논하거나 조언을 구하려고 하면 미리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걸 왜 내게 물어보냐, 내가 뭘 아냐"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나는 엄마의 냉정한 태도 앞에서 필요한 것들조차 요구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라나는 사방이 단단하게 막힌 벽과 같았다. 나는 그 벽을 기어오를 수도 넘을 수도 없었다. 점차 내게 일어난 사소한 일조차 엄마에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엄마는 '중학교밖에 못 나왔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라고 다그치곤 했다. 나는 늘 엄마의 기분을 살펴야 했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동생에게는 달랐다. 엄마는 동생과 소소하게 일상을 묻고 필요한 것을 먼저 챙겨주었다. 자주 이야기도 나누고 동생의 일들을 먼저 궁금해했다. 남자아이니까, 덜렁대니까, 손이 많이 가니까, 막내니까 등의 이유가 붙었다.

내가 사귀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모조리 흠을 잡으며 놀지 말라고 했고, 행여 친구들을 데려오면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혼을 냈다. 반면에 동생의 친구들은 다들 성격이 좋다고 칭찬했다. 기꺼이 친구들과 어울리게 했으며 늦게까지 나가 놀게 허락했다. 엄마는 여자아이는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남자아이에게 친구는 평생의 재산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반장으로 뽑혔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반장은 돈이 드니 다시는 반장을 하지 말라고 했다. 여자가 나서는 일은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 후 나는 친구들이 나를 추천할 때도 절대 투표에서 내 이름을 적지 않았으며 부반장으로라도 뽑힐 것 같으 엄마가 무서워 울었다. 동생이 초등학생이 되자 엄마는 돈이 많이 들어도 좋으니 반장이나 부반장이라도 해보라고 사정을 했다. 동생은 반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때 혼자서 집안일을 해내곤 했다. 그비해 동생은 전혀 가사일을 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집안일을 왜 나만 해야 하는지 그 불합리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말했다.

"놔둬라 놔둬. 누가 너보고 도와 달라했어? 지가 좋아서 해놓고는. 하기 싫으면 너도 하지 말던가."

동생 또한 엄마의 말에 동조하였다.

어느 날 나는 동생에게 어지른 것들을 치우라고 요구하였으나, 그 말에 기분 나쁜 동생은 대뜸 벽을 주먹으로 쳐서 구멍을 냈다 - 그 당시 우리 집 벽은 석고 보드 판을 댄 벽이었다. 구멍 뚫린 거실 벽이 볼썽사납다고 엄마는 도배를 나와 둘이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무 잘못 없는 내가 왜 도배를 해야 하는지 이해되질 않았고 동생을 먼저 야단쳐야 하지 않냐고 물으니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안 도우면 누가 돕냐? 그리고 쟤가 너 안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다른 집 누나들은 맞고 산다더라. 그래도 쟤는 너를 누나라고는 부르잖냐."


대학을 갈 때도 가고 싶은 대학이 돈이 든다는 이유로 엄마는 등록금을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여자가 학교 멀리 가봤자 필요 없어. 조신하게 가까운 학교 다니다가 졸업하면 시집이나 가." 나는 단호한 그 말에 원서를 써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대학을 갈 때는 관련학과의 아는 교수를 수소문하여 상담까지 하고 왔다. 그 대학을 자퇴하자 수능을 다시 보게 하여 다른 대학을 보내주었다.  




가끔씩 내가 겪어온 이러한 편애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면 엄마는 '어쩔 수 없었어', 또는 '너는 그래도 ...하니까 더 낫지 않았니'라는 식의 말을 자주 했다. 그에 더해서 '너는 여자니까 참아라, 딸이니까 참아라, 누나니까 참아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차라리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라. 그럼 맘 편하지 않겠니? 엄마 없는 사람이 세상에 천지다. 너는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아들을 편애하던 가정에서 자라난 엄마는 자신이 받은 차별 대우불평 없이 살았다. 그러한 엄마의 시각에서 같은 여자이자 딸이며 누나인 '나'는 자신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참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우선순위에서 자주 밀려나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아들을 낳고 싶어서 약까지 지어먹었다는 엄마에게 동생은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고 아들이고 자신에게 요구할 줄 아는 힘센 사람이며, 동시에 그 요구를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드는 아픈 손가락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이라도 내가 다시 참고 희생한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친정가족이란 형태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러나 나는 이제 끝내야 한다.

외할머니로부터 엄마에게 이어 엄마에게서 내게로 온, 그리고 내게서 내 아이에게 물릴 수도 있을 이 편애의 고리를...






큰 아이와 산책을 나갔다. 멀리서 폭신하고 따스한 솜사탕 같은 바람이 불어와 손등을 스친다.

걸을 때 아이의 보폭과 속도에 내 걸음을 맞췄다. 빨리 이동해야 할 때도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이를 두고 먼저 가지 않았으며 아이가 걷기 싫어하면 안아주거나 잠시 쉬었다. 나와 같이 뛰고 싶어 하면 같이 달렸다. 잠시 마트를 들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올 때도 아이의 손만큼은 꼭 붙잡고 걸었다.

 

나와 아이는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나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아이의 미소가 싱그럽다.


이렇게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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