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여름이 되면 홍수가 찾아왔다. 으레 홍수주의보가 내리면 강물은 집 앞 도로까지 차오를락 말락 넘실대곤 했다. 나는 비가 조금 그치면 낡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물 빠진 검은색 우산을 쓰고 길가에 쪼그려 앉아 강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우산 틈 사이로 똑똑 흘러내리는 빗물에 얼굴과 몸이 젖어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쓰레기를 버릴 때 분리수거와 종량제 봉투를 사용해야 하는 법이 없었던 시절이다. 따라서 인근의 마을 사람들은 장마와 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집안의 온갖 물건들을 내다 버리곤 했다. 다 부서져가는 살림살이부터 쓸모가 다한 고장 난 물건들, 헌 옷가지 등등이 강물을 따라 함께 떠내려갔다. 큰 산과 작은 산처럼 어우러져서 서로 싸우고 이기려는 듯이 흐르는 물살 틈에서 온갖 물건들은 앞다투어 올라왔다 가라앉다를 반복하며 서슴없이 쓸려내려갔다. 굽이쳐 흐르는 물살과 쓰레기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섞여 흘러가는 일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편이 뻥 뚫리 듯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씩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흐르는 물살을 보았을까... 항상 사라져 버릴 거라고 죽어버릴 거라는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로 인해 생긴 불안은 어린 내 안에 늘 함께 있었다.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없이 불안하여 물 밖에 뛰어나온 고기마냥 온몸이 떨리고 기운이 땅으로 꺼진 듯 느껴질 때가 많았다. 도움을 받고 싶어서 청하면 엄마는 내게 더 큰 불안과 염려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작하기도 전에 '하지 말라, 너는 못한다, 너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등의 말로 나의 의지를 꺾고 모든 일을 그만두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나를 탓하고 비난했다. 나는 엄마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들을 묵인하고 용인했다. 아마도 그 때문이 었을까. 나를 깎고 얽어매고 한없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던 엄마로부터 잠시 벗어나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위안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흘러갈 것이라고, 저 강 위의 쓰레기들처럼 남김없이 떠내려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게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믿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아이는 부모가 채워준 세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 그 어떤 선택의 권리도 자유도 없었는데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차별이 주는 궁핍함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생각이 들면 스스로가 가여워져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행여 눈물이 날 새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나이 먹으니 주책이 늘었다고 한탄하면서 심호흡을 한 채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면 그 기억은 한동안 밑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의 편애와 차별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브런치에 글을 쓸 때마다 그때의 내가 생생히 기억났다. 40대인 나는 어린아이였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회피하고 묻어두고 시간이 지나면 아픈 마음도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떠오르는 기억들은 바늘의 형태로 마음을 찔러댔다. 한동안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올리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편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잔잔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차별의 기억들과 그 안에서 곪아 응어리진 감정을 떠올리는 것을 포함했다.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친정 엄마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무수히 노력하며 나의 욕구와 꿈을 포기한 지난날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렇게 내 아픔과 슬픔을 모두 내보내버리고 잊어버릴 셈이었다. "엄마 내게 왜 그랬어?"라고 수백 번 물을 수 있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 가지고 나를 괴롭힐 작정이냐'라고 반문하는 엄마는 결국 바뀌지 않을 것이고, 나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이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가 인연을 끊자던 5달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편애로 인한 상처가 낫지 않을 거라는 것과 애정 결핍과 인정을 향한 욕구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수긍하는 것 또한 힘들었다.
그러함에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글을 올리지 않고 한동안 브런치를 쉬었음에도 구독자가 늘어나는 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림이 울릴 때마다 나는 부끄럽고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글을 쓰며 위안을 받았듯이 이 글들이 부모의 편애와 차별로 인해 다친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과 위로를 건네줄 수 있다면 그 역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사장의 미약한 조개껍데기도 내게는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듯이, 내 삶 속에 담긴 아픔도 어느 이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브런치라는 백사장 한 켠에 놓아둘 것이다. 언제든 나와 같은 당신이 찾을 수 있도록.
쓰레기를 떠안고 흘러가던 강은 다시 잔잔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비가 그치면 물에 젖어 흙탕물이 되다시피 한 땅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더욱 단단해진다. 우리의 삶이란 긴 여정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상처들도 언젠가는 딱딱한 딱지를 벗고 새살로 차오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