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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n 10. 2024

책이라는 물성

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집에 있는 책장은 세 개다. 하나는 처음으로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워 왔다. 나머지는 공간 박스 네 개를 이어 붙인 뒤 원목다리를 박아 재활용한 것이다. 책장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책들을 뒤적거렸다. 


장 그르니에의 『그림자와 빛』은 1980년 6월 23일에 출판등록을 했다. 표지 자체가 누르스름하다. 가격이 3000원이다. 이십 대 초반 장 그르니에의 『섬』과 『일상적인 삶』에 빠져있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다른 책을 발견하고 냉큼 가져왔다. 실제 이 책을 구입한 것은 1990년대 초반 무렵이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빼놓을 수 없다. 1948년에 초판을 펴냈고 1985년에 개정판 7세를 펴냈으니 그즈음 구입했을 것이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윤동주의 시를 기억하기 위한 어린 학생의 갸륵한 마음이었다. 파란색 하드커버 위를 덮고 있는 비닐은 이미 너덜너덜하다.  


양귀자의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은 1989년에 초판 인쇄를 했다. 1990년 6월 5일에 중판 발행했다. 가격은 3500원이다. 『원미동 사람들』을 읽은 후 한동안 양귀자 소설에 빠져 살았다. 심지어 『원미동 사람들』은 두 권이다. 사실은 이 책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점에서 2012년 개정판 4판 발행을 보고 다시 집어 들었다. 표지 그림 때문이었다. 고찬규 작가의 그림은 익숙했다. 깡마른 몸, 툭 튀어나온 광대, 가늘고 긴 팔과 다리,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 모습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작가가 말한 ‘헐벗은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1991년에 발행한 『한국현대미술운동사』의 표지는 원래 순 백색이다. 시간의 먼지를 입은 백색은 흰색과 회색 어딘가쯤에 있었다. 대학교를 다니며 학내에 민중미술 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아리 회원들은 별반 없었다. 명색이 회장이니 미술과 관련한 서적들을 꽤 읽었다. 잡식성이 아니라 다소 편협하게 말이다. 민중미술 서적만 읽다 보니 햄이나 소시지만 먹는 기분이었다. 신선한 야채도 필요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고전이다. 이어 미술평론가들의 책들을 읽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면서 한동안 섭식하던 미술 관련 서적들은 조용히 멀어져 갔다. 


1993년에 발행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꽤 정확하게 기억한다. 거의 그즈음이었다. 인천에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다. 제물포 지하상가에 작은 헌책방이 있었다. 서가를 어슬렁거리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첫 문장은 이랬다.


‘나는 서른일곱 살이었고, 보잉 747기의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강하하여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중이었다.’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내 미래를 그려보기에 막막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변화의 시대에 하나둘 발맞추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이 조금은 뒤처진 채로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무심한 일상생활로 채워가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만 이런 기분으로 사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그런 알지 못할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책이 그렇다. 만져지지 않는 텍스트를 눈으로 읽으며 오감으로 느낀다. 문장을 따라 이미지를 떠올리며 행간을 서성이기도 한다.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한다. 종이책의 종말을 예고하기도 한다. 검지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순간만큼은 책의 물성을 느끼는 강력한 찰나다. 읽는다는 것은 행간과 행간 사이 숨 고르기를 밝혀내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그 숨 고르기에서 생각의 찌꺼기를 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읽기와 쓰기를 반복하는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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