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낯익었다.
은하면 장곡리 장촌마을로 들어가는 군도1호선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이어졌고, 길가에 식재한 무궁화는 비록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지만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1999년에 심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2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느티나무는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그늘을 선사한다. 경관이란 그런 것이다. 나 혼자 아름다운 것을 보고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보고 느끼며 경관이 선사하는 선물을 만끽하는 것이다.
구항면 태봉리 외중마을은 군도1호선을 기준으로 좌우측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북쪽 방향을 봤을 때 우측이 볕고개와 귀암골, 좌측이 가오래기다. 볕고개는 그 이름에 걸맞게 하루 종일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당연히 작물도 잘 된다. 한차례 고들빼기를 수확하고 다시 고들빼기 씨를 뿌린 농부의 밭에 고들빼기 싹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당연히 풀도 함께 비집고 나온다. 농부가 쪼그리고 앉아 고들빼기 싹인지 풀인지 구분도 안 가는 밭을 맨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서늘하면 서늘한 채로 볕고개에 쏟아지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김을 맨다.
밭에는 고추, 속새, 고들빼기, 유월태 등 풍성한 가을 작물이 가득이다. 덩달아 농부의 손은 겨를이 없다. 쏟아지는 가을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어간다. 작업하는 늙어가는 농부들을 보니 '바쁜 살림에 늙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절로 생각난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마을회관과 마을창고, 정자는 모두 볕고개에 위치한다. 작은 하천을 뒤로하고 지어진 정자는 여느 계곡 근처에 있는 쉼터 모습과 비슷하다. 하천과 이어지는 경사진 땅에 지지대를 박고 골조를 만든 널찍한 평상 형태의 정자다. 처음에는 비가림막이 없다가 추가로 지붕을 씌웠다. 정자 한가운데는 빗자루가 걸려있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먼지 많은 정자에 앉을 때 빗자루질을 하고 앉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토종닭백숙과 소주 한 잔이 생각난다.
정자를 지나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장수바위가 있다. 장수바위에 전해지는 유래는 없지만 바위 규모로 봤을 때 수 백 년이 넘은 자연적 바위임에는 틀림없다. 널찍한 모양의 바위와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모습의 바위는 놀거리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최적의 놀이터를 제공했다. 장수바위를 오르내리고, 웅덩이에 첨벙 들어가 땀을 식혔다. 이제 그 아이들은 머리 희끗한 중장년이 되어 장수바위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을 뿐이다.
귀암골은 마을 안쪽에 위치한다. 산에 푹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집들도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얼핏 보면 사람의 왕래가 드물 것 같다. 하지만 이사 온 사람과 고향에 돌아온 사람, 떠나지 않고 터전을 지키는 이들이 숨 쉬고, 먹고, 일하고 있다.
전갑순 씨가 냉이 밭에 쪼그리고 앉아 김을 매다가 뒷집 이순애 씨와 먼 거리 이야기를 나눈다. 전갑순 씨가 고구마가 개갈 안 나지만 맛은 괜찮다며 가져가겠느냐고 한다. 이순애 씨는 고구마 줄기만 무성하고 고구마는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잘 되었다며 풀 사이를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와 고구마 삼매경에 나섰다.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지인에게 보낼 요량이다. 웬만한 아기 얼굴 크기만 한 고구마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예쁘네, 이런 게 맛있다, 라며 주거니 받거니 말이 오가니 혼자 사는 마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타원형의 농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고목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100여 년은 될법한 느티나무는 굳이 느티나무라 부르지 않고 고목나무라 부른다. 나무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 덩치가 작은 아이들이 숨어 놀기에 적당하다. 마을에 아이들이 한창 있었을 때 아이들 숨바꼭질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지금은 헛헛한 바람이 구멍을 오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일하기 싫지만 하루 종일 놀 수도 없으니 밭으로 향하는 안영준 씨가 느긋하게 저적 저적 댄다. 병원에 가 있는 형님네 집을 지키는 개에게 밥을 주고 오는 길, 김숙자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몇 일째 이어지는 상수도관 공사로 좁은 농로를 따라 덤프트럭이 몇 차례 오가고, 굴착기로 땅 파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래도 어쩌랴, 추석 전에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인부들의 노고에 토를 달 수는 없다.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자니 덤프트럭을 피해 요리조리 세 번을 옮긴다. 덤프트럭 기사도, 안영준, 김숙자 씨도 민망함에 껄껄 웃는다. 결국 길가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독배에 배 들어올 때는 광천 컸어."
"지금은 별 거 아녀. 홍성만도 못혀."
"예전에 광천 가다가 혼난 생각나네. 우리 형부가 독배에서 사는디 젓국 김장한다고 사러 간다고 하니까 쫓아 나왔더라고, 황석어젓을 잔뜩 사는디 그걸 머리에 이지 못하고 내리지도 못하고. 그걸 이고 오는디 죽을 뻔했네. 지금 같으면 한쪽에 내버리고 왔을 거야."
"그런데 냉이 밭에 약 했나?"
"풀이 조금 남았으면 약해서 던져 놓으면 되는데 다 죽으면 뭐 캐?"
"캐면 이파리만 생기지. 이파리 생기면 서리 나."
"아휴 그만 할 거야."
"내년에 안 하게?"
"왜 안 혀? 하던 버릇 있으니께 쬐금이라도 해야 동태라도 사 먹지."
"돈 생기는 데가 있깐?"
"그러다 저러다 그냥 죽는겨. 그런디 오래 앓지 말고 죽어야 하는데."
"그게 문제여."
허공을 지그시 쳐다보던 두 사람이 가을 햇빛에 얼굴을 가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다. 안영준 씨가 한마디 덧붙인다.
"재밌었어. 여기 나오네 좋네. 집에 가면 빈집이잖어."
귀암골 상엿집을 지나 메타세쿼이아가 가득한 숲길로 접어든다. 작은 가오래기다. 메타세쿼이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집 주변에 벌들이 앵앵거린다. 전병덕 씨가 하는 양봉이다. 모랭이을 돌아 큰가오래기에 달콤한 과일 냄새가 가득이다. 전병철 씨가 재배하는 딸기와 샤인 머스켓 향기다. 늙은이들만 산다고 말하는 서용순 씨다. 어디 가오래기만 그러랴. 젊은이들이 들어오지 않으니 아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은 지 오래다. 터전을 지키던 이들만이 묵묵하게 살아갈 뿐이다. 농로를 따라 걸으니 은하면 대율리로 가는 고개다. 농로 주변에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지천이다. 정인갑 씨가 심어놓은 감나무가 익어가는 가을을 따라 주홍빛을 자랑한다. 입을 쩍 벌린 밤송이 사이로 터질듯한 밤이 머리를 쏙 내민다. 발끝으로 떨어진 밤송이를 두 발로 잡고 벌리니 밤이 머리를 내민다. 바지에 쓱쓱 문질러 어금니로 반을 가른다. 우두득 씹히는 밤 소리가 마을의 정적을 깬다.
가오래기 끝자락에서 뒤를 돌아보니 연둣빛 벼가 고개를 숙인 채 자울거린다. 또 한 해가 그렇게 지나는 것이리라, 생각하니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틋함에 마음이 서늘하다. 당신에게 담담한 안부를 건넨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