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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Sep 07. 2022

우리 역사 속의 범죄자들.16.서진룸살롱 사건

16.집단광기의 현장, 서진룸살롱

16.집단광기의 현장, 서진룸살롱


1990년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이 발효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깡패들은 오랜 세월동안 활개를 쳤다. 물론 이전 전두환 때 '삼청교육대'가 탄생하면서 깡패들을 군대의 일종인 '삼청교육대'로 끌고가 일제 소탕을 한 적이 있었지만, 사실 삼청교육대는 깡패들 뿐만이 아닌 노숙자나 부랑아, 혹은 그저 일반 직장인이나 학생들까지도 끌려가는 무작위하고 대단위로 이루어진 인권 유린이었다.


하지만 삼청교육대에서 살아남은 정치깡패들과 삼청교육대에서 살아남은 깡패들은 물론 지역 사회에서 새롭게 태동한 깡패들은 이 시기 이후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 데에 더욱 몰두하며 80년대 중반, 이른바 '양은이파', '서방파', '오비파' 등 호남의 조폭들이 서울을 삼분할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86년 8월 14일 강남에 있던 서진 룸살롱에서 서울 목포파 일당 11명이 맘포파 7명을 피습하여 4명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맘보파 조직원 중 한 명이 교통사로를 내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출소한 기념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 옆방에는 서울 목포파 인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맘보파 일행들은 방이 좁다며 바꿔줄 것을 요구했고, 종업원은 다음날이 광복절이라 이미 방이 다 차서 바꿔줄 방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맘보파 일행 중 한 명이 종업원을 구타하였고, 이후 구타당한 채로 울고 있던 종업원을 본 목포파 일행이 이유를 묻자 종업원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고난 목포파 일행들은 분노한다. 사실 서진룸살롱은 목포파 구역내의 업소로 다른 조직인 맘보파가 들어온 것부터 기분이 나빴지만 맘보파는 정식 조직인데 비해, 목포파는 한국유도대학(이후 용인대로 변경)의 선후배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조직 훈련생들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업원들로부터 맘보파 조직원들이 무기도 없고 술에 취한 상태란 사실에 용기를 얻어 칼과 야구방망이 등을 꺼내들게 된다.


마침내 맘보파 방문을 박차고 들어간 그들은 맘보파의 행동대장이자 유명한 칼잡이였던 조원섭을 집중 공격하며 회칼로 무차별 난자를 했고, 그외에도 3명을 더 칼로 찌르고 나머지 조직원들에게도 상해를 입혔다. 결국 맘포파 7명 중 4명이 그자리에서 숨지는데, 목포파 인원들은 이 시체를 싣고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 병원으로 가서 "교통사고 환자요!"라고 소리치고 던져 놓고 오기까지 한다.


                                             검거 당시의 장진석, 김동술 - 서울신문


범행 직후 사건의 파장이 커지고 경찰들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자 하나 둘 자수를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다른 조직원이나 주변인물들을 대신 자수 시키는 등 수사에 혼선을 주기위해 노력했다. 특히,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전북 임실의 한 저수지에 숨어 은둔생활을 했는데,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 경찰 5명이 체포하러 가자 칼과 낚시 도구 등을 들고 끝까지 저항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두명이 체포되었을 당시 취재진이 현재 심경이 어떻냐고 묻자 오히려 "무슨 말이 듣고 싶소?"라고 되물으며 허세 섞인 대답을 하여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도 깡패들이 경찰에 연행되면 증거품인 흉기가 널린 책상 뒤로 고개를 숙인 짧은 머리 덩치들의 모습이 일반적인데, 그들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전혀 반성없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이들의 허세는 구속 후 며칠 만에 바뀌어 현장검증 때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당시 군사 정권 아래서의 경찰과 검찰이 운동권 학생이나 민주화의 투사처럼 사회적 파장이 있지도 않을 깡패들을 어떻게 다루었을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사실 맘보파는 당시 3대 폭력조직인 김태촌의 서방파 방계의 조직 중 하나였기 때문에 학생들로 이루어진 목포파를 우습게 보고 그들의 세력권인 서진룸살롱을 자신들의 축하 장소로 삼았던 것인데, 이들이 몰락하자 김태촌에게도 파장이 미치게 된다. 이 사건 바로 전에 김태촌이 고위 검사와 연루되어 뉴송도호텔 나이트클럽의 사장을 칼과 낫으로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던 터라 김태촌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된다. 물론 김태촌은 이후 복역 도중 폐암 진단을 받아 형집행 정지로 사회에 나오게 되지만 1992년 '범서방파'를 다시 조직했다가 다시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어쨌든 사건 당시 정요섭을 제외한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이었던 목포파는 모두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되었고, 1996년 12월에 벌어진 1심 재판에서 고금석, 장진석, 김동술, 김승길은 사형, 박영진은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김승길, 장진석은 무기 징역으로 형이 낮춰지며 김동술과 고금석만이 사형을 받았고 나머지는 복역을 바치고 사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당해 보이는 목포파의 가해자들 - 시사저널


어쨌든 이 일로 한국유도대학은 조폭 양성소란 비난을 받다가 용인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깡패들의 잔인한 범죄 행각에 분노를 느낀 국민들은 이들을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간혹 남자들 사이에는 작은 일 하나 때문에 서로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혹은 술자리의 단순한 시비가 과격한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정도를 넘어 온갖 흉기를 들고 단시간에 4명의 사망자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특히 맘포파의 행동대장 조원섭은 헤비급 복서 출신으로 서울과 목포에서 이름난 싸움꾼이었지만 그래서 가장 먼저 수차례 흉기에 찔려 사망하였다. 결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폭력배들의 멋진 활극은 그냥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이고, 사실은 잔인하고 비열하며 치졸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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