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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Sep 14. 2022

우리 역사 속의 범죄자들.19.보도연맹 학살사건

19.한국의 홀로코스트, 보도연맹 학살사건

19.한국의 홀로코스트, 보도연맹 학살사건


전쟁이란 대부분 사람들의 광기를 자극하곤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살고자 하는 본능이 광기로 표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광기가 정당화 될 수는 없고, 정당화 되어서도 안된다.


6.25 전쟁 중에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역시 그렇다. 


그럼 우선 '보도연맹'이란 어떤 단체인지 살펴보자. 이 보도연맹의 성격은 그들의 행동 강령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2.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하자.

3. 우리는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

4. 우리는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정책을 분쇄하자.

5. 우리는 민족진영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보조를 일치하여 대한 기상을 발휘하자.



위의 강령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들은 대표적인 반공세력이었다. 과거 좌익에 몸담았지만 전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단체로 실질적으로는 좌익에 몸담지 않았던 사람들도 무수히 많이 가입해 있던 단체이다. 대표적으로 만화가 김용환, 소설가 염상섭, 황순원, 시인 정지용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에게 주어진 보도연맹증


그리고 당시 공무원들은 보도연맹에 사람을 가입시키면 실적이 올라갔기 때문에 서로 여기에 사람들을 가입시키기 위해 열을 올렸다. 덕분에 보도연맹에는 반강제적으로 가입된 일반 국민들이 많았다. 오히려 우파에 속하는 인물들도 다수 가입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수 순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일부 좌익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소탕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사회적으로 빨갱이로 낙인 찍히게 되며, 이들에 대한 폭력 사건도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6.25 전쟁이 일어나서도 이들은 정부의 통제를 잘 따랐다.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정부가 피난을 떠나기 전까지 검찰의 지휘 아래 서울을 지키며 피란민을 돕고, 행정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제10대 대한민국 감사원장을 지닌 정회택씨는 "시민이 피란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 6천 8백 명의 보련(보도연맹)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협력하는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는 좌익이었다가 전향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북한의 압박이 컸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이들은 일종의 배신자였기에 이들에 대하여 당연히 더 큰 압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서 이들은 이중배신자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내부배신자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 선을 결정하는 것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었다. 즉, '100명 가운데 1명이라도 이상한 짓을 한다면, 차라리 100명을 모두 죽이는 편이 사회가 안정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이 논리는 혹시나 북한에 동조할 인원이 있을 수 있으므로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죽이자는 결론으로 이어져 결국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북한에 점령 당한 지역은 포기하고 자신들이 확보하고 있던 남부 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이승만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우선 각 지역에서는 일제히 단속을 벌여 보도연맹원들을 경찰서에 구금했는데, 이 와중에도 경찰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나 뇌물을 주었다거나 이승만과 종씨라는 이유로 풀려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구금되었던 인원들은 그대로 트럭에 실어 마을의 야산이나 배 위로 데려가 그대로 총살했다.


                                             보도연맹의 학살 현장 - 나무위키


6월 말부터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시작된 이 학살은 7월이 되며 충청과 호남, 서부 경남 지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북에서 밀고 내려올 때 밀리던 군인들이 우선적으로 한 일은 보도연맹원들을 사살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충청과 호남, 서부 경남 지역의 경우 인민군과 국군이 서로 밀고 밀리다 보니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는 인민군들에게, 국군이 점령했을 때는 국군에게 학살을 당했다. 물론 인민군이 점령하지 못한 낙동강 방어선 안쪽(대구 이남 지방)에서는 국군들이 보도연맹원들에게 분풀이로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반인륜적 학살이 끝난 것은 미국의 압력이나 정부의 변화 때문이 아닌 바로 중국공산군(중공군)이 이 전쟁에 개입하면서였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미군과 국군은 모자라는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쓸데없는 곳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던 군인들을 모조리 최전방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물론 이 인원에는 보도연맹원들도 포함되었다. 학살이 아닌 전쟁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4.19 혁명 이후 전국의 유가족과 국민들이 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자, 제4대 국회에서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진상 조사를 벌였으며 당시 총리였던 장면은 희생자들에게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며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의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었다. 이들은 특수범죄처벌법이란 것을 만들어 희생당한 보도연맹원들의 유해를 수습하려는 유가족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하기까지 하였다. 처벌을 당하지 않은 유가족들 역시 연좌제에 의해 빨갱이로 의심받으며 정부의 감시를 당해야 했다. 게다가 진상조사를 통해 모아두었던 모든 자료를 소각하며 진상을 은폐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보도연맹'이란 단어 자체를 지워버렸다. 


1990년대부터 그나마 이 사건이 소설이나 회고담 등에서 '어떤 단체', 'B 연맹' 등으로 표현되거나 민간 단체에 의해 유골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다시 한번 '보도연맹'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며 오랫동안 묻혔던 비극이 드러나게 된다.


                                                           노컷뉴스 자료 사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사망자는 약 5천 명 정도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워낙 군사정권 당시 많은 자료를 소각하고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였기에 아직도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2007년부터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해체되던 2010년까지 학살 추정지 168 곳과 우선발굴대상지 39곳의 발굴을 하였다. 그리고 발굴된 유해들은 충북대의 전산원 건물이었던 곳을 새단장하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으로 꾸며 여기 안치했다.


그러나 2014년에는 경남 진주에서 유가족과 시민 단체의 주도로 유해 발굴이 이어졌고, 2015년에는 대전 동구에서 다시 유해 발굴이 이어졌으며, 2017년에도 경남 진주에서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00명 중 1명의 혹시나 모를 배신 행위를 막기 위해 100명을 모두 죽이겠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는 인간이 맞을까? 때로 인간은 악마보다 더 악마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하다.



희생당한 분들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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