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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Sep 16. 2022

우리 역사 속의 범죄자들.20.국민방위군 사건

20.허술한 정부의 민낯, 국민방위군 사건

20.허술한 정부의 민낯, 국민방위군 사건


지금도 나라돈을 우습게 여기고 횡령하거나 마음대로 쓰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국고는 그야말로 정부단체들의 쌈짓돈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늘 이야기할 '국민방위군 사건'을 살펴보자면 당시 정부가 얼마나 허술하고 방만하게 국정을 운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49년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분산되어 있던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조직한다. 이 대한청년단의 총재는 이승만 자신이었으며, 장택상, 지청천, 전진환, 신성모, 노태준 등 이승만의 측근들이 최고위원 자리에 앉았다. 이 대한청년단은 정부의 적극적 지원 아래 200만 단원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지만, 애초에 목적이 이권 단체였기에 계파 갈등과 지분 싸움 등으로 분열되자 최고위원회를 대신해 단장제로 변경하게 된다. 1대 단장은 신성모였고, 2대가 안호상, 3대는 김윤근이 임명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지며 밀리던 국군이 겨우 전선의 안정화를 찾아갈 때 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전선은 열세를 맞이하게 된다. 이승만은 최후 결전을 위해 국민총동원을 발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진입대 러시를 이루게 되는데, 미군정은 새로운 부대를 만드는 것보다 기존 부대를 확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우선 인력 충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독자적인 '국민방위군'을 설치하는데, 이들은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제2국민병이 된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표되고 모집을 시작하자 국민방위군은 삽시간에 5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정부는 이들을 경북 일대에 51개의 교육대를 만들어 수용하였는데, 간부들은 대부분이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정부는 이들의 수장을 당시 '대한청년단' 단장이었던 김윤근을 추대하는데, 김윤근은 갑자기 준장에 임명되며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되었고, 대한청년단 간부들을 자신의 참모진으로 꾸리게 된다.


국민방위군 간부진 - 사친 출처: 통일뉴스


그러나 중공군의 거센 반격에 밀려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면서 국민방위군 인원들 역시 남쪽으로 후송할 계획을 세우는데, 전쟁 초기에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의 청년들이 북한군 의용군으로 합류한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목적이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국민방위군 예산을 총인원 50만 명으로 설정해서 3개월 분 209억원으로 책정했는데, 이는 개인당으로 상정했을 때, 식량도 마련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국민 방위군 숫자는 100만 명에 달했으며 이 와중에도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예산을 빼돌려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전국 각지에서 창설되었던 국민방위군은 1.4 후퇴와 함께 후방으로 남하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간부들이 사병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하였기 때문에 영하의 날씨에서 장거리를 이동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식량과 피복 조차 제대로 지급받기 못했고, 결국 아사와 동사자가 1천 명이 이상, 이 후에도 후유증으로 약 9만 명의 인원이 사망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했던 국민방위군들은 집단으로 탈영하기 시작했고, 결국 국민들 또한 이런 사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론에 밀린 이승만 정부는 현장 조사를 실시하면서도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데 집중한다. 애초에 방위군 간부 몇몇 만을 상대로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 것이다. 당시 국방장관이자 초대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낸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현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였던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한다. 결국, 이선근은 사령관 김윤근은 무죄, 부사령관인 윤익현은 징역 3년 6개월의 형을 내린다. 이 결과에 국민들은 다시 분노하였고, 이승만은 직접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후임으로 이기붕을 앉힌다. 이후 국회에서 다시 사건을 재조사하자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현을 비롯해 재무실장 강석환,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 10억 원 가량을 빼돌린 것이 드러났다. 또 이들은 정치인들에게까지 수 천만 원을 뇌물로 준 것이 밝혀지며,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역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다시 재판이 이뤄졌고 앞서 이야기한 핵심간부 5명 전원은 군법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정작 뇌물을 받았던 정치인은 한 명도 처벌되지 않았으며, 이들이 빼돌린 국고 역시 되찾지 못했다. 


처형되는 국민방위군 간부진 - 사징출처: 서울의소리


결국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설치법 폐지안이 결의되면서 국민방위군은 해산하게 된다. 대한청년단 역시 1953년 9월 이승만의 명령을 해산되었다. 덕분에 이승만의 오른팔이었던 신성모가 실권을 잃게되고 뒤를 이은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그것도 이기는 전쟁도 아니고 지고 있던 와중에 나라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겠다고 자진한 젊은이들 수만 명이 위정자들의 욕심 때문에 전투 한 번 치뤄보지 못하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후 이루어진 사후 처리 역시 얼마나 자신들 멋대로 법과 행정을 주무르고 농단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도 정치인이 국영기업이 나라의 돈을 자신들 돈처럼 써대면서도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결국 1950년 대의 사고 수준에서 정말 발전하지 못한 것일까? 위정자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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