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개인평가가 좋지만은 않다
Disclaimer: 저번 글부터 해서 고작 20개월 다닌 회사를 너무 까는 듯이 말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지만... 나는 삼성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미운 점도 많지만 배운 점, 고마운 점도 무척 많았고, 첫회사라 그런지 아직도 애정이 간다. 싸랑해요 쌈쑹!
"So Sean.. walk me through key results you have achieved this year. I am just going to listen for the next 15 minutes"
여러 번 했음 해도 항상 숨이 턱 막히는 고과평가 면담의 시작 멘트다.
삼성을 퇴사하고 외국계로 이직한 나에겐 외국계의 고과평과(performance review)는 신세계였다. 보스가 진심으로 나의 성과를 궁금해하는 눈빛과 자세로 나의 1년간 성과를 귀담아듣고, 일방통행적인 피드백이 아닌 서로의 잘한 점과 개선점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굉장히 살 떨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어필할 성과가 없다면? 열심히는 했는데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면? 아니면 15분 채울만한 성과의 양이 부족하다면?
외국계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다닌 회사는 연말평가만큼은 진심이었다. 이 점이 나는 무척 좋았다. 11월에 면담이 진행됐는데 무려 한 달 전부터 면담 스케줄을 공유해준다. 더불어 performance review를 작성할 시간을 반나절 아웃룩캘린더에 block해놔도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평가에 필요한 정보를 타 부서에 요청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actively 서로 공유해주는 분위기가 깔려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제품 원가절감을 drive했는데 정확히 이게 연 얼마를 save햇는지를 구매 또는 공장 finance에 문의하면 1원 단위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삼성의 고과평과 방식과 정반대로 "팀"이 아닌 "나"의 성과를 중요시했다. 팀이 잘해서 시장점유율이 올라갔건, top/bottom line 타겟을 맞췄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동료들의 흔한 실수가 팀의 성과를 performance review에 줄줄이 적는 것이었다 (실은 나도 한 실수라 잘 안다 ^^;) 이 경우 보스는 미간을 팍 찌푸리시며 바로 챌린지가 들어온다. "So, what have YOU contributed to the team's performance. Please focus on yourself" 이 말을 듣는 순간 연말평가는 속된 말로 조졌다고 할 수 있다. 개인 성과를 말할 게 없는 사람, 아니면 자기 PR을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개인 성과에 99% 포커스 하는 문화이니만큼, "고과 돌려막기"란 존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한국 대기업처럼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레 승진하는 것이 아닌, 다음 레벨로 올라갈 역량이 확인되어야만 승진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몇 년 연속으로 최고 고과인 outstanding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기서 재수 없는 자랑타임을 갖자면.. 나는 2년 연속으로 받았다 ㅎㅎㅎ) 10년 연속 average만 받는 직원들도 있을 법한 인사 시스템이었다.
이런 고과 평가 시스템은 누군가에겐 fair하고, 누군가에겐 잔인했다.
1. 모두가 high performing individual 일 순 없다!
각 부서별 흔히 말하는 "에이스"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100을 맡겨도 120, 150을 이뤄낸다. 두리뭉실한 업무 지시를 받아도 objective를 crystallize하여 성과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가 에이스일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래서도 안된다. 지나치게 self-centric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팀워크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toxic한 조직문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는 말레이시아 지사로 옮긴 후 2년간 미친놈처럼 일했다. 글로벌 조직개편으로 인해 베트남을 제외 한 동남아팀에 유일한 제품 개발자로 내부 인사이동을 한 직후였다. 연차는 나에겐 사치였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중국 할 거 없이 업무에 필요한 출장이 있으면 주말, 연휴를 할애해서라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싱가폴 공장은 종종 운전을 해서라도 방문했었는데 하루 업무를 끝내고 집에서 저녁 8시쯤 출발하여 국경 근처 모텔에 12시 도착, 새벽 4시에 일어나 국경을 통과하기도 했다. 매일 싱가폴 국경을 넘어 출근하는 말레이시안들이 90만 명이라고 하니, 새벽 4시에도 약 2시간이 소요됐다. 이렇게 새벽 6시경 싱가폴 공장에 도착하면, 1시간 정도 공장 쇼파에 쭈그려 앉아 부족한 잠을 청하였다.
워커홀릭이었던 나에게 자연스레 좋은 성과가 따라와 주었고, 회사도 2년 연속 최고 고과를 부여했다. 1인 부서였음으로 제품에 대한 모든 성과(소비자조사 승리, 원가절감, 소비자 리뷰)는 대부분 내가 독차지했다. 성과가 너무 obvious하니 performance review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15분이 부족했으니까. 보스도 내 성과가 두드러지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기저기를 통해 이미 알고 계셨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업무별 유관부서가 보통 2~3팀이 있는데, 각 팀별 실무자들을 제법 괴롭혔다. 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를 들어 원가절감 진행 시 제조, 구매, 마케팅팀의 협조가 필요한데 이들에겐 크게 중요한 KPI가 아님에도 나는 이메일, 채팅, 와츠앱, 심지어 직접 방문하는 등의 방법으로 업무 "협조"를 요청했다. 업무 진행이 더뎌지면 윗선을 찔러 반협박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밟았다. 여기에 나를 말레이시아로 데리고 오신, 당시 디렉터분이 사장으로 승진되는 바람?에 나의 인맥을 간사하게 활용하는 빈도수는 늘어만 갔다. 내가 toxic environment의 주체자였던 것이다. "팀"이 아닌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High performing employee라 자부하던 나에게, 2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코로나라는 break가 걸려왔다. 공장이 shut down되고 출장도 금지되고 재택근무로 전환되니 별로 할 게 없었다. 웃긴 건 내가 오버해서 일하지 않아도 회사는 잘만 돌아갔다. 항상 긴장감이 높았던 나와 동료의 대화는 웃음의 장으로 바뀌었고, 워커홀릭이었던 자신을 점점 내려놓았다. 한때 회사 성과평가 시스템의 수혜자였던 나에게, 꼭 high performing individual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레슨을 알려준 고마운 코로나였다. 너무 길어져서 문제였지만..
2. 아직 성과를 낼 수 없는 role level이라면..?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대리~과장 (4~10년 차?) 정도가 실무를 제일 많이 하는 시기라고 한다. 실무를 하는 만큼 성과가 비례하기 쉽다. 불쌍한 건 완전 초짜 사원급이다. 외국계도 크게 다를 건 없다. 내가 삼성에 근무했을 때처럼 사원(주니어)에게 많은 잡무를 주진 않지만, 업무 하나하나의 contribution이 적을 수밖에 없다. 제품을 개발할 때도 실제로 개발을 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시니어들이 짜온 feature, idea 평가에 필요한 prototyping, trial plan정도를 맡는다. 제품이 성공적으로 론칭이 된다한들 주니어들은 "이게 내가 만든 제품이다"라고 느끼지 못할 법하다.
그럼 주니어들은 성과평가 때 무엇을 적어야 하는가? 여기서 개인별 PR 역량이 갈라진다 말할 수 있다. 회사는 SMART를 강조했다. Objective setting때 교육받는 스킬이기도 하지만, performance를 적을 때도 매우 도움 되는 5개의 principle이다.
Specific
Measurable
Achievable/Attainable
Realistic/Relevant
Time-bound
작은 업무 하나하나 위 principle (특히 S,M)을 따르면 제법 괜찮은 성과처럼 포장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제품 아이디어를 prototyping 함" 보단 "제품 아이디어를 prototyping하여 제품 디자인 decision을 2주 만에 가능케 함"정도면 bad에서 not so bad performance로 바뀌게 된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뭐 낯간지럽게 그렇게 쓰냐고 할지 몰라도 내가 다닌 회사에선 이런 스킬이 must였다. 내가 맡은 업무의 스케일이 작을지 몰라도 이 업무가 회사에게 가져온 유의미한 result를 알리는 것도 승진에 주요한 역량 중 하나였다.
솔직히 내가 이렇게 말해도 주니어 때 적을게 별로 없는 게 현실이긴 하다. 매니저로 승진 후 나와 일하는 주니어 2명의 performance review를 봐도 뭔가 짠함이 느껴졌으니까. 얼마나 적을 게 없으면...ㅎㅎㅎ 그래도 해야 한다. 100명의 주니어 중에서 stand out 하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이니.
3. 주도적으로 업무를 drive하지 못하는 부서?
홀로 제품 owner이다 보니 나에게 업무협조를 요청하는 부서가 많았다. 마케팅, 공장, supply chain, sales, 심지어는 법무팀까지 제품에 연관된 모든 일들은 나를 통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됐다 (이 부분 때문에 내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던 것도 고백한다). Specificiation publisher/approver이다 보니 제품의 1mm라도 나와 협의 없이 바꾸지 못했으니.
결국 완제품을 파는 회사인데, 모든 부서가 어떻게든 나와 협업하여 성과를 도출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구매팀이 더 싼 supplier가 있는데 내가 평가를 안 해주면 진행자체가 불가능했다 (퇴사 한 지금에도 구매팀에게 제일 미안하다.. 항상 상냥하게 나에게 요청했었는데 그 당시에 업무가 너무 많아 나는 4가지 없게 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한때는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여기저기 협조를 요청하던 사원이었는데, 개구리 올챙이시절 기억 못 한다고.. 내 성과만 보이는 일만 입맛대로 고른 것도 인정한다.
그래도 여기서 내가 도와주고 싶은 request, 쳐다도 보기 싫은 요청이 differentiate 되었다. 바로 준비성이었다. 툭 던지는 식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때?"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메일이었다. 내가 반응을 하면 결국 opertaional 업무는 내가 봐야 하는데 간보기 식으로 협조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바로 무시했다. 반대로 "내가 이런 아이템이 있는데, 다른 region 제품에서는 이렇게 평가를 해봤고, 이렇게 적용해보면 X달러의 효과가 있을 거라 판단돼. 어떻게 생각해?" 식으로의 이메일은 내가 기꺼이 너의 성과를 위해 이용당해줄게!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예시의 업무 요청 이메일이었다.
내가 혹여 이직에 성공하여 타 부서에게 많은 비중을 dependent 한 부서로 간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성과로 뭐라도 적을 수 있으니...
4. Role level이 올라갈수록 적을 게 없다..
케바케겠지만 내가 매니저로 승진되어 2명의 주니어 개발자를 두게 된 후 느낀 점이다. 내가 해오던 실무의 많은 부분이 주니어에게로 re-assign되고, 나는 그저 큰 틀에서 그들을 코칭하며 굵직굵직한 decision정도만 내려주는 매니저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점은, 이제 "나"의 성과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내 보스께선 주니어의 성과가 곧 나의 성과가 된다지만, 이때까지 직접 손, 발로 해결하여 도출한 성과들만 적어온 내게는 무척 낯선 경험이었다. 뭔가 그들의 성과를 뺏는 느낌이라고 할까..? 공장에 직접 가서 평가하고, 제품을 만져봐야 하는데 이제는 주니어의 리포트를 책상에 앉아서 읽기만 하는 입장이니...
초반엔 나의 new role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직접 뛰었다. 여전히 공장에 방문하여 실무를 도맡았고 (주니어는 옆에서 지켜만 보고...) 실무자 간의 회의도 부지런히 참석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내 보스가 내 behavior에 주의를 주었다 (나중엔 이 보스에 대해 써보겠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보스였으니) 너의 새로운 responsibility를 다시 review 해보라시며.. 그제야 크게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실무진이 아니구나. 이제는 업무의 대한 성과가 아닌, 사람의 대한 성과로 prove를 해야 하는 위치구나... 성과평가 때 이제 hands-on 업무에 관한 성과는 성과로 쳐주지 않겠구나.. 아니 오히려 쪽팔린 일이구나.. 라며. 주니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윗사람들이 지켜봤을 때 나의 성과구나..
하지만 매니저 승진 후 첫해 성과평가는 정.말. 적을 게 없었다. 다행히 상반기까지 시니어 개발자로 일한 덕분에 hand-on 업무에 대한 performance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지만, 하반기 매니저로서의 performance는 내가 봐도 초라한 성적이었다.
이 고민은 내가 퇴사 전까지 계속 지속되었다. 주기적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지금 당장 보스가 성과평가를 하시자면 뭐를 어필해야 하지...?" 아쉽게도 이 의문은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퇴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관리직로 올라오면서 오히려 PR 할 성과가 적어진 케이스였다. 아마 많은 분들도 이런 고민을 하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