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큐

by JVitae

몇 주 전, 영어가 서툰 타이완 출신 중년 여성 하나(이하 피큐)가 나와 같은 교회 스몰그룹에 조인했다

남편의 새 직장을 따라 온 가족이 시애틀로 옮겨왔다 했다


며칠 전, 스몰그룹 리더에게서 문자가 하나 왔다

피큐가 마이크로소프트 applied scientist role로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냐 물었다

그러겠노라 해서 어제 영상통화를 했다

피큐는 현재 타이완 어느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했다

가족이 거주지를 미국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으며 새 직장을 구하는 모양이었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와이프들 중에는 기존에 직장을 다니고 있었음에도 미국에 와서는 가정주부로 전향하는 케이스들이 많다

남편의 새 직장에서 전에 둘이 벌던 것보다 많은 돈을 주는 것이 하나의 이유요

갑자기 외국에 살게 된 자식들의 학교생활 적응을 도와줘야 하는 것이 하나의 이유요

그 와중에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새 직장을 찾는다는 게 몹시 어려운 것이 또 하나의 이유다


이번 인터뷰는 피큐가 미국 회사에서 따낸 첫 인터뷰라고 했다

어려운 길을 가기로 선택한 피큐가 인터뷰를 꼭 통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아는 얘기를 다 해줬다

피큐는 고맙다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연신 인사를 했지만

결혼 전 아무리 결혼생활에 대해 들어도 막상 결혼생활을 해보지 않고는 그 뜻을 알 수 없듯이

출산 전 아무리 육아에 대해 공부를 해도 막상 아이를 낳아보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듯이

인터뷰를 경험해보지 않고는 내가 해 준 얘기가 무슨 뜻인지 다 모를 텐데 노파심이 들었다


인터뷰 전에 모의 인터뷰를 같이 해주기로 한 것 이상으로 내가 더 해줄 건 없어 안타까웠다

모를 일이다

피큐는 똑똑하고 경험이 많아서 내 얘기를 잘 알아듣고 준비해서 처음 보는 인터뷰에 찰싹 붙을지도

세상엔 늘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일어나 날 뻘쭘하게 만들곤 하니


피큐와 통화를 하며 느닷없이 나 스스로가 보잘것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박사를 받고도 교수가 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내 나이 또래에 교수를 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곧잘 쭈글해진다

피큐가 인터뷰를 본다는 Applied Scientist 포지션이 나와 같은 레벨 혹은 그 이상이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아이들을 낳고 난 뒤로는 승진 속도가 확연하게 느려진 것에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


남편에게 그 기분을 털어놓았다

나 2, 30대 때는 스스로 빛난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닌 것 같아, 4, 50대 때 한 번쯤 더 빛나볼 수 있을까, 그래보고 싶다

남편은 내가 말하는 빛난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본인에게 직장이란 그저 돈 많이 주고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결론지어 버리기에 난 아쉬운 맘이 들었다


오늘 아침 아이들을 데이케어에 데려다주고 장을 봐 돌아오는 길, 내가 말했던 빛난다는 것이 뭘까 생각해 봤다

성취해 냈던 순간, 인생의 방향이 확 바뀌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남들에게 그 결과를 내보였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지원한 학교에 붙었던 순간

학위를 받았던 순간

회사 인터뷰에 합격한 순간

그럼 4, 50대 때 한 번쯤 더 빛나보고 싶다 함은 회사 내에서 큼직한 직함을 따내는 일을 뜻하는 걸까


언젠가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미국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난 여기서 임원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감히 꿔본 적이 없다

영어도 서툴고 social skill도 부족하고 일 능력 자체도 부족한 내가 이곳에서 임원이 되려면 어느 만큼의 성장과 개조가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욕심을 내봤겠다는 걸 깨달았던 날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도전조차 엄두가 안 나지만 한국이었다면 욕심을 내봤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이 비겁하게 느껴져 미웠고 미국에서 갖고 사는 패배감이 한심했다

내가 미국에서의 미래에 그어버린 한계가, 그로 인한 답답함이 스스로 더 이상 빛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일까


질문만 있고 답은 없다


방황하는 마흔 살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현실은 직관적으로 잘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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