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글, 그림
일단 걷자.
무거운 이불 걷어내고
눈곱 떼고, 귀찮으면 마른세수라도 해.
아직 서울은 쌀쌀하니까 따뜻한 겉옷 챙겨 입어.
강아지 목줄 채우고, 간식도 넉넉하게 챙기고,
공도 하나쯤 필요하겠지.
아차차, 고양이 밥은 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오케이.
이제 문밖으로 나가자.
믿어봐, 오늘 가장 힘든 부분은 다 지나갔어.
바람이 아직 좀 찬가?
웬만하면 그늘은 피해 가자.
발길 닿는 대로 그냥 걷기만 해.
헛둘, 헛둘,
바닥만 보지 말고
어깨 펴고, 코어에 힘주고
성큼성큼 걸어.
한 바퀴 돌고 나면
좀 나아질걸.
괜찮아, 이런 날도.
괜찮을 거야, 내일도.
집을 나서기 전 온몸을 쭉 휘어 기지개를 켰다. 겨우내 몸이 얼마나 굽어 있었는지, 기지개만 켜도 키가 1센티는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다녀올게.”
숨숨집 안에서 게으르게 나를 바라보는 두 마리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겨울의 끝 무렵, 산책 사정이 훨 나아졌다. 조금의 한기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겹겹이 껴입었던 옷의 레이어가 줄어들자, 관절과 피부에 숨 쉴 여유가 생겼다. 몸의 무게와 부피가 줄어드니 걸음도 한결 가볍다. 이러나저러나 다 털 없는 인간네 사정이지. 이중모의 두툼한 털옷을 입은 개는 한결같이 신이 난 모양새다.
집 근처 거리는 매우 복잡하다. 마주 오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십오 분을 빠른 걸음으로 쭉 걸어가면 언덕 위에 공원이 나오는데 이 동네는 공원에도 사람이 많은 게 함정이다. 나는 벤치에 앉아 전날 작업실에 두고 온 망한 그림을 되살릴 방안을 고심하다, 벼락처럼 번쩍 떠오른 그리운 얼굴에 마음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엔 도망가는 게 답이지. 조금 더 멀리 가보자.
공원을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고, 큰 대로변을 따라 샛강을 지나, 개의 잰걸음에 맞춰 약간 숨이 차오를 정도로 빠르게 걸었다. 마침내 한강에 다다를 즈음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좁은 오솔길을 발견하고는 얼른 새로운 산책 경로를 개척해 보기로 했다.
아무렇게나 뻗어나간 가지들이 얽히고설킨 긴 나무 터널을 빠져나갈 무렵, 철렁이는 물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바닥에서 시선을 떼자 물결치는 윤슬과 에메랄드색 철교, 콘크리트 도시,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이 소소한 탐험의 결과에 겨우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좀 쉬어볼까.
강변에 설치된 조망 데크에 양반다리를 하고 멍 때리는 인간의 모습에, 계속 사주 경계를 하던 개도 포기하고 바닥에 풀썩 엎드렸다. 한숨. 개의 한숨에는 몇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고 했다. 긴장이 풀린 걸까, 진짜 한숨인 걸까. 아직도 엉성한 인간은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이름 모를 철새 무리를 관찰하다 풍경 사진을 몇 장 찍고, 기계적인 손짓으로 의미 없는 짧은 영상들을 넘겨보다 망할 사이사이 광고에 염증을 느끼고는 또 멍을 때리다가,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몇 자 적은 다음 옆에 드러누운 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고선 긴 한숨. 그러고선.
강가의 공기를 한껏 들이켜 폐를 최대한으로 부풀렸다가 길게 내뱉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넘실대던 우울도, 돌아갈 근심도 조금이나마 흐릿해진 건 햇빛 덕분일까. 정수리 한가운데가 제법 뜨끈해졌다.
그래, 이만하면 됐지. 돌아갈 결심이 섰다.
“모네야, 오늘은 햇빛이 참 좋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깍지 낀 손을 저 멀리 뻗어내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의 근육과 피부가 부르르 떨렸다. 개도 곁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포르르 기지개를 켰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의 우울도, 강가의 풍경도 뒤로 젖히고 돌아가야 할 곳으로 성큼성큼.
한강 둔치에는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 불쑥 고개를 내민 싹이 막 움트기 시작했다.
저기, 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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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 Edition”은 게으른 작가를 깨우기 위한 셀프 동기부여의 마음을 담은 드로잉 프로젝트입니다. 매달 한 장, 일상의 온도를 담아낸 그림과 짧은 글을 함께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