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딱히 없었다. 처음 그림책 작업을 시도했을 때도, 리포트를 제출하고 졸업 논문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전시를 위한 작가 노트를 작성할 때에도 여전히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 영역이었기에, 반드시 써야 하는 상황에서만 어거지로 글을 썼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맞춤법도 엉망이고, 작문에 관해서는 도통 아는 게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 글을 쓰는 행위로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든 건, 병으로 먼저 떠나보낸 작은언니의 목소리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였다. 몇 년 전 아파트 베란다에 마련한 작업 공간에서 전날 끝내지 못한 그림들을 손보고 있을 때였다. 늘 언니에 대한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문득문득 일상에 틈이 생길 때마다 떠올랐다. 그리고 매번 두 눈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그날, 아파트 앞 8차선 대로변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순간에 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언니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충격이었다. 언니를 떠나보낸 지 몇 달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니. 평생을 함께한 가족인데 말이다. 그렇게 며칠을 작은언니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완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 순간을 계기로 글이 쓰고 싶어졌다. 과거의 기억이든, 현재의 일상이든, 미래의 꿈이든, 그 무엇이든. 그리고 실제로 시도하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드문드문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핸드폰 메모장에다 주절주절 글을 써놓고 또 잊어버리는 식이었다.
몸은 느리고, 생각은 늘 많다. 너무 많은 생각들 때문에 결심하지 못했고, 결심하고도 실천하지 못한 일이 수두룩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반나절 정도의 인간이랄까. 아무튼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수많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다는 오버씽킹(Over Thinking)이라는 병과 되도 않는 완벽주의자 성향이다. 그런 내가 쓸 수 있는 건 나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정도의 글이다.
예전 그림책 스승님께선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 배움을 체득하고 실천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작업의 주제가 될까. 마치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고귀한 핏줄이나 국가고시 자격증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늘 생각해 왔다. 나는 그저 그림을 오래 그리고 싶은 사람일 뿐인데.
어쨌거나 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했기에, ‘제대로 내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되자’라는 쪽으로 결심이 기울었다. 그렇게 서른 중반이 넘어 대학원에 들어간 이후로 몇 년간, 내 작업의 주제는 내면의 혼란과 불안이었다. 당장 뭘 그려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뭐라도 그려야 한다는 혼란과 불안이 그나마 몸을 움직이게 했다. 그것이 그 당시 나의 상태였다. 그리고 작업을 통해 위태위태하고 초조하고 복잡한 30대의 불안을 겨우 흘려보냈다. 아니, 인정했다. 그게 나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다시 돌아와, 요즘의 생각은 거지 같은 글, 엉망진창인 글, 헛웃음이 나오는 어이없는 글일지라도 뭐든 떠오르면 써보자는 것이다. 그림에도 진짜 내 이야기를 담자, 평범할지라도 스스로에게 진실된 이야기만 하자, 누가 어떤 경로로 이 글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나의 결심을 알게 해서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자는 나름 비장한 각오로 지금 이 순간에도 글을 쓰고 또 수정하고 있다.
지난달 브런치에 처음으로 글과 그림을 올리고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공표한 날, 한 친구가 개인톡으로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었다. 고민하는 당신! 그럴 시간에 지금 당장 한 글자라도 더 써보라고, 아름답고 다정한 글로 독자를 두들겨 패는 내용의 책이었다.(친구야, 고맙다) 한 번에 몰아서 읽었다간 체할 것 같아 잠들기 전 또는 일어난 후에 한 편씩 읽고 있다. 이 글을 마치기 전에, 오늘 아침 읽은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강 작가의 답변을 옮겨본다.
“작가는 고독하게, 그저 혼자서 하다가 실패하면 혼자 망하는 것”
몹시 동의한다. 망하더라도 그저 고독하게 혼자 망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면, 그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아름다운 순간들은 너무나 쉽게 휘발되어 버린다. 아무튼 이것이 인터넷 한 귀퉁이를 영원히 떠도는 잡글이 될지언정,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기억하기 위해 살아가볼 생각이다.
+ 그래도 가급적 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2024년도에 그린 돌탑 그림을 올려봅니다.
+가끔 언니의 기억을 떠올릴때마다 매번 다른 목소리를 상상해봅니다. 아, 이건 좀 아닌데 싶을때면, 슬픔도 아주 조금은 옅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작은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으이구 참 니답다 할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