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

필름의 풍경 ‘눈뜬 장님들의 도시’

by 도반

점점 잊혀 가지만 우리의 현대사는 피로 쓴 흔적이다. 엄혹했던 70년과 80년 대를 가치면서 민주화라는 갈증은 사람들을 목마르게 했다. 아무도 병들지 않았는데 아픔을 호소하던 자각한 이들은 거리로 나왔고 자유를 외쳤다. 군인들이 모든 것을 지배한 세상은 폭력과 탄압으로 그들을 막았다. 만들어진 뉴스들만이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던 시기에 눈 뜬 자들은 진실을 전하려고 동분서주하며 투쟁했고, 그날의 총칼과 군홧발은 아직 상처로 남았지만 빛을 찾았다는 안도로 극복하고 있다. 이란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아 왔다. 노동자의 생존 투쟁은 정권에 위협으로 간주되어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눈을 가린 상태로 고문을 당한다. 일부는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기억을 잊으려고 애쓴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오로지 소리만 남은 이들의 유실된 사실을 추적하는 로드무비다.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는 눈 뜬 장님들을 영화에 등장시킨다. 좁은 차 안에서 체제의 부역자와 희생자들은 퍼즐을 맞추지만, 촉각과 청각이 만든 상흔은 모순만 남긴다.


자파르 파나히는 국가의 분란을 야기하고 정치적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15년의 법적 제재를 당해왔다. 그럼에도 그는 이란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 영화는 예술을 위한 수단 이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스피커이자, 부당에 맞서는 주먹이다. 많은 감독들이 검열이라는 정치적 칼에 상처 입고 망명 길에 오를 때 그는 묵묵히 이란 영화를 찍었다. 자국의 현주소를 픽션과 다큐를 오가며 갱신되는 모습을 담았다. 그는 억압받는 시네마의 최전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중국의 왕빙이나 러시아의 세레브렌티코프와 같은 행보다. 이들은 국경을 넘지 않고 선을 지우며 예술의 경계는 구분되지 않는 아름다움에 있음을 역설한다. 그보다 자유로운 다른 나라에선 시네마의 종말을 말한다. 미학의 최전방으로 밀린 영화는 이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영화의 오프닝은 한 가족을 비춘다. 임신한 엄마와 과묵한 아빠, 명랑한 딸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는 어두운 밤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운전하다 실수로 개를 친 남자는 차에서 내려 죽은 것이 개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동을 건다. 아내는 아무도 안 다쳐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남자는 보지 못했노라. 변명을 한다. 그들의 딸만이 아빠가 죽였다고 항변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말 뿐이다. 영화는 사고를 낸 가해자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시각화되지 않은 폭력은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명제를 개의 죽음을 통해 은유한다. 이어지는 시퀀스로 바히드가 등장하고 남자의 말과 행동은 반박된다. 차가 고장 나 우연히 들른 민가에서 들리는 그의 의족 소리는 바히드의 내재된 트라우마를 깨운다. 자신을 감금하고 고문한 자 에크발, 온몸이 떨리고 그날의 기억에 분노가 치밀지만 침착하게 계획을 세우고 납치에 성공한다. 눈을 가리고 당했던 폭력, 사랑하는 사람의 자살 끔찍한 기억들로 울분에 찬 복수를 하려던 순간 자신은 에크발이 아니라 말하는 그놈, 결백을 믿어 달라는 그의 말에 바히드는 피해자를 수소문한다. 그렇게 원흉과 시선을 마주한 적 없는 이들이 모인다.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당한 그들은 역전된 상황의 가해자를 두고 보이지 않던 공포와 가해지는 아픔의 빈자리를 응시한다.


그가 에크발임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지워진 역사의 한 조각을 맞추기 위해 모인 이들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삐걱이는 의족 소리, 체취와 의족이 빠진 자리에 남은 다리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몽타주는 완성이 안 되고 트라우마는 더 깊어진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갈라진다. 그냥 죽이자는 의견과 범인을 확신했을 때 죽이자는 의견이 대립하고 눈을 가린 채 포박된 에크발은 말이 없다. 바히드와 사진작가인 시바, 결혼을 앞둔 알리 커플과 시바의 전 연인이었던 하미드는 점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물음표를 제시한다. 의족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범인으로 확신해 납치하고 감금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그들은 복수에 눈이 먼 검객이 아니다. 노동으로 건실한 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일 뿐이다. 그들은 생각한다. 비좁은 밴 안에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해하는 일은 온당한가. 그들은 타고 있는 밴이 죽음의 운구차가 아닌 지난 상처를 기억의 공유를 통해 치유하는 실존하는 장소로 만들고 있었다.


하루를 다 보내는 동안 그들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놔줄 수도 계속 잡아둘 수도 없는 상황에서 뜻밖의 전화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에크발의 전화로 딸이 다급한 목소리를 낸다. 임신한 엄마가 고통스러워한다며 아빠를 찾는다. 이들의 임무는 부역자를 색출하는 심문자에서 산파로 변한 것이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고 새 생명을 축하한다. 새로운 탄생을 목도한 그들은 분노에 찬 복수대신 관용을 택한다. 자파르 파나히는 폭력을 중심에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스위치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복수가 촉발하는 앙갚음대신 새로운 세대의 탄생이 불러올 변화를 믿고 트라우마를 전복하는 현재를 만든다. 그러나 마지막에 소름 돋는 시퀀스를 통해 누군가 폭력에 희생되는 상황이 현재형임을 말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바히드의 등으로 의족 소리가 들린다. 환청일까. 돌아온 에크발일까. 아직 불안정한 이란의 모습을 영화는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진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폭력은 가늠을 통해 윤곽을 드러낸다. 어쩌면 우리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방황하는 눈 뜬 맹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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