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풍경 “자연은 비유하지 않는 예술”
라벨의 ‘거울’은 투영된 마음을 비춘다. 그중 3번은 제목처럼 바다 위에 홀로 있는 작은 배를 상상하게 된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도, 그곳에 떠있는 사공의 마음을 생각하게 한다. 거울에 맺히는 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지만 투영된 이미지는 정반대의 것을 제시한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뜻하는 바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속인다. 라벨은 음악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친 진짜 자신을 보려 했다. 그 선율은 크리스티안 페촐트에게서 바람이 되어 날아갔다. 바람은 사람을 스치며 잔영을 남기고 그의 카메라는 그림자로 소실된 혹은 소멸한 빈자리를 어쩌지 못하는 이들을 담아낸다. 살랑하고 부는 바람이 그들을 밀어 서로를 마주 보게 한다. ‘나’였을 동시에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한다.
라우라는 다리 위에서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다. 강물 속에는 자신이 보인다. 그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남자친구와의 여행도 즐겁지 않다. 그는 계약을 위해 상사 커플과 떠났고 들러리로 참여한 라우라는 탐탁지 않다. 길을 가다가 한 중년 여인을 스쳐간다. 이윽고 사고가 일어나고 남자친구는 즉사한다. 근처에 있던 그 중년 부인은 라우라를 간호한다. 그녀의 이름은 베티였다. 사실 시점 쇼트로 두 번 라우라를 바라보는 장면이 담기는데 이는 베티가 라우라에게서 자살한 딸 엘레나가 겹쳤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라우라의 부탁으로 베티의 집에 한동안 기거를 한다. 일련의 사건으로 가족의 구성원이 된 라우라, 그녀는 옐레나가 입었던 빨간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는다. 집단속에서 자신을 잃었던 라우라는 옐레나라는 그림자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불안정한 자신을 버리고 가족 구성원이 된 라우라는 평안을 느낀다. 옐레나를 함께 잃은 아빠인 리하르트와 오빠인 막스도 서서히 마음을 연다. 옐레나의 옷을 입고 피아노를 치며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영화는 라우라의 사고 이전의 시공간을 지운다. 마치 그건 이미 사라지고 라우라는 옐레나와 겹치는 림보에서 헤매고 있다고 하는 것 같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베티가 안정을 찾고 떨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뭉쳤다. 자전거를 타던 라우라는 막스에게 안전한 길을 택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점점 가까워지는 가족들은 한편으로 불안하다. 이러다 진짜 옐레나가 지워지진 않을까. 그리고 라우라와 막스의 스킨십의 순간, 막스는 그녀를 밀치며 너는 내 동생이 아니란 말을 한다. 그 순간 위태하게 유지되던 모든 것이 깨진다. 라우라는 그들을 거부해 진짜 가족인 아빠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고 남겨진 베티 가족들은 이제 옐레나의 물건들을 처분할 결심을 한다. 그들은 빈자리를 억지로 붙들고 있거나 자신을 어떤 집단 속에 밀어 넣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라우라는 남자친구인 야곱과 함께 듣던 신디사이저 음악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 후 베티의 집에서 업라이트 피아노를 치며 안정한다. 그 집에서의 생활은 라우라를 편안하게 했다. 식물을 기르고 꽃으로 차를 끓이는 자연의 포근함이 있는 삶, 리하르트와 막스 부자는 카센터를 운영한다. 기계로 된 세상에 머무른다. 집안에 유일한 가전인 식기세척기도 고치고 자동차를 개조한다. 어쩌면 그런 인공적인 것들이 옐레나를 자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인공적으로 만든 것들이 예술을 파괴하고 순수한 영혼들은 상처를 입는다. 라우라는 옐레나로 살아보며 자신이 왜 죽으려 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돌아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회를 무사히 마친다. 베티 가족들은 몰래 가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자유로운 그녀는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옐레나의 영혼이 라우라를 부른 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자신과 같은 고민과 상처를 지닌 사람이 우리 가족을 만나 서로의 내면을 보고 치유받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란 추측으로 가 닿았다. 이제 모든 것이 금속 소리를 낸다. 노랫소리는 바람에 실려온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잊은 채 죽어간다. 나인 것 그것은 피아노, 그것은 자전거 예술은 비유되지 않는다. 비유는 다만 형용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