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적호 Jul 02. 2024

#30. 도덕도 교육할 수 있나요

교육 잡설(雜說)

#30. 도덕도 교육할 수 있나요


    인류는 각 시대와 국가마다 국민,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인간은 대규모 사회를 이루며 진화했고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했습니다. 규칙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고 고대 국가는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법, 종교, 철학은 대표적인 규칙이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1년~기원전 221년)는 이런 다양한 규칙을 실험하는 장이었습니다. 유학의 인의예지신, 법가의 법(법), 도가의 도(道), 묵가의 겸애(兼愛) 사상처럼 각자의 신념에 따라 규칙을 만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진시황은 이런 사상을 통일하며 강력한 법과 형벌을 기준 규칙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스는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기본 규칙을 탐색합니다. 고대 중근동은 종교와 경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규칙, 헤게모니를 형성합니다. 


    때로는 종교나 철학을 바탕으로 계급이나 직업별로 규칙을 만들기도 합니다. 왕가와 귀족, 로마의 군인, 중세의 기사와 수도사, 무사와 승려, 유자 등은 각 집단을 대표하고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지켰습니다. 이들의 규칙이나 규범은 초기에는 성문화되지 않지만 점차 강화되고 강제하기 위해 관습이 되거나 법제화됩니다. 


    한편 일부 집단의 규칙과 규범은 대중에게 일반화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결국 일부 소수 집단의 충성만으로 거대해진 국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왕가와 귀족의 가치관은 그들이 되고 싶었던 더 많은 젠트리와 부르주아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습니다. 기사, 무사, 수도사는 그들의 명예뿐 아니라 일상의 규칙까지 모두 일반인들의 규범으로 변합니다.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절대적 권력과 넘사벽이었던 양반은 이후 한국 사회에 관습적 규범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당연히 양반이라는 제도가 좋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후대에 좋은 부분만 남지도 않지만 한국 사회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주류였던 조선의 선비에 대한 이유가 필수입니다.


    우리가 구축하고 전해야 하는 것이 시대의 정체성이라면 종교, 법, 철학 등이 대표적입니다. 어느 시대는 종교가, 법이, 철학이 우위에서 다른 분야를 이끌었습니다. 물론 현대는 과학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여러 가지 대표적인 개념들을 시대의 정체성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이 뒤따릅니다. 


    종교는 교리와 신성이 있고 법은 법의 철학과 정신이 존재하며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이런 개념의 기준이 되면서도 총괄하는 정신을 ‘도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덕은 개인과 사회의 행동을 규범 하는 기준으로, 선과 악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바람직한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대마다 지배 개념이었던 종교, 법, 철학이 항상 아름답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권력의 편에서, 어떤 때는 대중을 선동하며 그들만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작동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와 이유로 지금까지도 면면히 세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지배 개념은 한 가지 형태가 아닌 다양한 결합, 조화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런 지배 개념들이 가장 합리적 방식으로 결합되도록 의사결정하고 유지하고 전합니다. 그런 우리의 노력과 별개로 항상 아름다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회를 선도하는 개별적인 개념도 중요 하지만 이 저변에 깔려있는 도덕도 발전시켜야 합니다. 


    특히 20세기 과학 혁명 이후로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고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첨단 과학 문명 속에서 도덕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수많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 도덕을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도덕은 이미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고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도덕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규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구성원들의 행동 기준을 제시합니다. 또한 법과 달리 개인의 양심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수됩니다. 마지막으로 도덕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며 문화적으로 다양하면서  동시에 인류전체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정의는 도덕이라는 단어에 한정된 것이고 사실 ‘이것이 도덕이다’라고 도덕을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도덕은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교육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심지어 교과과정으로 도덕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실 교과과정으로의 도덕은 철학적 방법론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철학적 방법론을 학습해서 정의롭고 아름다운 의사결정을 하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시대와 사회마다 자신들의 종교와 법, 철학을 교육하며 도덕적 방법론과 윤리의식을 가르쳤습니다. 조선은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 자체가 도덕, 윤리 교육이었습니다. 


    도덕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던 ‘소학()’은 조선 도덕 교육의 총화였습니다. 이렇게 도덕(유학)으로 무장한 조선 초는 후기에 비해서는 나름 합리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 및 반대파 숙청과정에서 벌어진 도학정치에 반하는 비도덕적 행위는 지배세력에 심각한 상처를 입힙니다. 


    도덕적 기준은 처음에는 분명하고 명확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틈과 경우가 생기고 욕심은 독버섯처럼 이 틈을 정신없이 메웁니다. 이 틈을 법과 힘으로 메우려 하지만 훼손된 명분은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틈은 메워지지 않고 점점 벌어져 결국에는 대중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희생은 도덕을 살찌우지만 현실타협은 이익을 낳습니다. 효율성은 자본을 진화시켰고 도덕을 죽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었고 동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바보의 삶입니다. 도덕은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잠깐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던 남명 조식은 방울과 칼을 차고 다니며 자신의 언행에 스스로 경종을 울렸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의병이 되어 이름 모를 산야에서 희생됩니다. 그의 정신은 현재까지 글로 남아 전해지지만 당시의 지배층에게 엄격함을 강조하는 조식은 돈키호테일 뿐이었습니다.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은 성리학 원리주의에 교조적으로 빠져들고 백성들에게도 충효예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사회가 됩니다. 주자 성리학은 권력을 위한 지배 이념이며 행동하지 않는 죽은 도덕은 진정한 사문난적()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도덕은 학습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까요? 성경은 시작인 창세기부터 신과의 약속, 인간의 자유의지, 원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도덕은 신, 사회, 자신과의 약속인지도 모릅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인간은 사과 한 입에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자유의지를 발현한 원죄를 짓고 영원한 벌을 받습니다. 도덕은 인간 이성의 산물인데, 이성이 살고 도덕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성경 속 인류는 죄책감을 가지고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통해 신과의 약속을 구체화합니다. 최소한의 율법이며 도덕입니다.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전문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1 나를 제외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나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거나 그것으로 예배하지 말라.

3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죽이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노비를 탐내지 말라. 그의 여종을 탐내지 말라. 그의 소를 탐내지 말라. 그의 나귀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모든 것을 탐내지 말라.


모세의 십계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10번이 흥미롭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가 정말 지키기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유대인, 특히 동일한 종교를 가진 이웃에게만 한정하여 적용되지만 인간 본성을 초월하는, 당시에는 지키기 어려운 율법이었을 겁니다.


    예수는 결국 이 율법을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와 유대인 이외의 민족에게도 지평을 넓히며 기독교를 자애와 사랑의 종교로 구현하고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엽니다. 이 도덕적이고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개념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고 시대와 민족을 떠나 황금률로 여겨지는 사실입니다.


    어떤 조직이든 행동강령을 만들고 이를 어길 시에 따르는 불이익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것은 법적이기도 하고 종교적, 철학적이기도 합니다. 


   도덕을 교육하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정의되지 않는 도덕을 교육하다 보니 다소 관념적이고 추상적입니다. 도덕은 법이나 정의와 또 다릅니다.


   절대적인 방법은 없지만 칸트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선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덕은 시대가 변해도 지속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대 도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시대를 어렴풋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시대의 글을 읽은 겁니다. 글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한 추론이 가능합니다. 다만 글을 읽을 때 현대의 우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 되지만 그래도 말만 하는 것보다는 의미 있습니다. 


    고전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고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양한 간접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희극과 비극을 느끼며 울고 웃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비난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정과 관계없이 우리는 여전히 행복합니다.


    고전이라고 반드시 어려워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고전은 동화책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이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든 읽는데 어렵지는 않습니다. 어려워서 고전이 아니라 지금까지 읽혀서 고전입니다.


돈키호테 표지

     본능적 영역은 학습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 도덕은 공부가 필요한 의식적 행위입니다. 도덕적 행동은 다소 본능, 욕망을 억제하는 이성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도덕적 행위는 사회와 관습의 영역이기도 해서  다양한 공부법이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철학과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에 도덕수업은 철학과 종교 내용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물론 공부의 형식만으로도 어떤 사람은 도덕심을 형성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도덕은 형식만으로 완성되기에는 뭔가 아쉬운 부분이 존재했습니다. 도덕은 좀 더 복잡한 근원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덕이 평화를 유지한 제국의 질서라고 여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국을 만들어도 어떤 시대에는 도덕이 욕망에 패했습니다. 어떤 때는 타락한 권력과 종교에 도덕이 집 밟혔습니다. 심지어 근대의 과학혁명과 이성적 합리주의는 인간성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선사했지만 세계대전으로 절망했습니다. 


    더구나 개인주의가 절대 선이었던 시기조차도 개인 보다 국가, 조직이 우선되고 개인의 도덕은 희미해지고 조직의 그늘에 편입되었습니다.  특히 전쟁은 개인의 도덕과 이성을 보이지 않는 먼 우주의 행성처럼 존재하지만 인식하지 않는 부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각을 할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립니다. 그런데 인류는 도덕의 붕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도덕이 생존에 필요하다면 본능이 먼저 자각하고 법보다 숭상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는 법보다 관습, 종교가 더 중요했습니다. 도덕의 결과가 이익이 된다면 종교,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세상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기술이 도덕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SF물에서 AI는 인간의 비합리적 의사결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AI가 인간의 의사결정을 돕는 존재에서 다스리는 존재로 진화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종교에 기댔던 것처럼 스스로 판단의 준거를 AI에게 맡기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종교시대처럼 과학에 대한 공포가 어둠처럼 퍼져나가고 있다는 단편이기도 합니다. 오감으로 인식하던 세계는 이미 과학의 능력으로 확장된 경험을 한 인류는 이제 상대적으로 미지의 영역이었던 뇌의 판단까지 과학에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초기 자율주행차량 개발에는 딜레마 상황에 대한 철 지난 여러 논쟁이 펼쳐졌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세부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AI는 행동에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AI 알고리즘의 속도와 정확도는 혁신적으로 높은 반면, 설명력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처음에는 다소 안심했습니다. 그런 인류의 안심을 비웃듯 chat GPT는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에도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수천만의 동시 접속자는 지금도 다양한 내용을 묻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에는 도덕적 딜레마도 포함되어 있고 AI는 빠른 속도로 인류의 문명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물론 AI는 문학작품을 짓고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며 이제는 스스로 코딩도 하고 코딩 작업 간 더 좋은 알고리즘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문학도 인간 고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사실 복잡해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하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신은 인간 행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단순함 속에 감추기도 합니다. 불합리한 인간의 선택, 집단생활, 문자와 언어 등 문명은 의외의 안정성을 제공했습니다. 종교, 왕권, 과학 등의 절대적 권위 아래 안정감, 심지어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일시적인 자유에 대한 열망과 한없는 불합리한 선택의 연속은 어느새 피로감을 제공합니다. 대중은 본능적으로 안정적 삶을 원하고 정의나 도덕 때문이 아니라 권위에 의한 평온을 원합니다. 역사적 반동은 개인의 복수보다 더욱 강하고 빠르게 반복되기도 합니다.


    권위적인 성향이 더 많은 민족이 대가족 가부장제도를 가지고 있는지 대가족 제도가 권위에 순응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민족마다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대가족 제도가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할수록 권위에 대한 도전은 계속됩니다.


    그렇지만 사회 집단의 최소 단위인 가족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면 개인만 남고 인류는 완전히 소멸하게 됩니다. 그런 일은 본능의 영역에서 납득할 수 없고 결국 반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극단적으로는 집단 자살적 행위나 허무주의로 빠져들며 사라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권위주의적이나 개인주의적이나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본능은 주의보를 발동하고 반동이 일어날 경우,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운 에너지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디스토피아에 도덕은 사회가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개인 선택의 영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수준의 개인과 사회의 도덕이 완성, 일치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도덕은 사회의 방향성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도덕성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사회적 도덕의 수동성을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국 홀로 서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의 행동이 하나의 도덕을 만들어 나갑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세계보편적인 도덕과 윤리가 있고 개개인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매일 노력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삶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도한 소수의 의견과 권리가 보호된다고 사회의 도덕이 저절로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종교에 많은 것을 기댔던 인류는 근대화 이후 종교에서 인적 물적 요소를 국가와 개인에게 이전했습니다. 종교는 권력, 재산, 교육, 그리고 뛰어난 사람을 빼앗겼습니다. 어느 국가는 받아들였고 어떤 국가는 반발합니다. 


    이전에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많은 국가도 이제 종교는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들은 과거와 단절했고 죽음 후 신 앞에 서기를 거부합니다. 일부는 오히려 원리주의적이 되기도 합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후기에 이전보다 더 강한 교조가 됩니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그렇고 개혁, 개방하며 자본주의를 일부 받아들였던 중국과 러시아가 과거보다 더 공고한 체제를 구축하려 합니다. 


    개인이나 소수와 달리 단체와 국가의 도덕은 조금 다릅니다. 개인은 살인하지 말아야 하지만 국가는 공식적으로 전쟁이란 행위를 통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세바스찬 융거는 “20분간의 전투만 치러도 한 인간이 평생을 통해 축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삶을 체험한다.” 고 하며 전쟁의 강력함을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참전군인의 트라우마는 오랜 기간의 근무가 아니라 짧은 기간의 강력한 전투 경험인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에 대한 예찬이 넘쳐나고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저마다 단상 위에서 과장된 몸짓으로 참전을 독려합니다. 복수, 살육, 배신, 반역, 외면, 약탈, 강간, 모든 것을 제한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허용합니다.


트라우마

    프랑스 잔다르크, 남송의 악비, 명의 원숭환 등은 결국 권력과 민중에게 이용당하고 죽습니다. 그들을 기리고 찬양하지만 당시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동족을 죽여야 한다는 전쟁의 불합리성을 오히려 영웅과 신화로 변경시켰습니다. 


악비와 정충보국

    전쟁은 모든 불합리성, 비이성주의의 끝판이지만 종결은 이성이었으며 이후에는 후회와 반성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자각과 진보를 이루어냅니다. 


    그런데 최근 전쟁은 대규모, 장거리, 정밀폭격 등, 직접 당사국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결국 익숙해지고 무뎌지면 이성은 마비되고 도덕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성을 차갑게 유지하지 않더라고 너무 쉽게 인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전은 우리에게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삶의 다양성과 고뇌를 제공하며 카타르시스(정화)의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것보다는 전쟁과 평화를 읽는 게 한 개인의 성장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도덕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노출이 필요합니다. 좋은 명언, 강의, 설교를 듣거나 읽을 때 잠시 공감했던 적이 누구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동의 순간은 너무나 짧고 일탈의 쾌감은 강렬합니다. 도덕적이고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그 행동자체에서 오는 거룩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인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고전과 예술을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상상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결국 지각과 감성은 분리하기 어려우며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을 경험하기 어려우며 육체의 근육처럼 정신도 끊임없는 자극을 통해 신경과 근육의 발달이 필요합니다. 이런 정신적 자극을 위해서 예술, 특히 고전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두꺼운 성경을 처음 완독했을 때의 자신감과 충만함은 다른 경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각 장의 내용이 이해가지 않거나 기억이 없어도 완독 했다는 사실만으로 영적인 세계에 한 걸음 다가간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설령 불사초를 얻지 못했고 지금 당장은 천국에 들지 못해도 무언가 영생의 비밀을 엿본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욥과 같은 시련이 남아있고 죄를 짓고 사함을 숱하게 받아야 겨우 천국 조건을 충족합니다. 


    결국 도덕은 그 시대의 관습적이고 법으로 혹은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금기와 권장하는 선함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시대의 염원과 전통, 법 철학을 담고 있지만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므로 개인의 영역입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철학이 존재해도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 한 명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결국은 개인의 모든 편견과 선입관에 흔들리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고 양심에 묻고 행한다면 각자의 도덕적 삶이 뿌리내리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비이성적이고 부도덕한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지적받는 현실에 대한 비판 보다 스스로의 가치 판단과 죄를 부끄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성적이고 도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도덕 역량이 필요하고 죄책감, 부끄러움을 아는 그들만이 미래에 나와 내가 속한 사람에게 평화를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전쟁은 적과 아군만 있는 이분법의 세계이며 명확하게는 삶과 죽음만 존재합니다. 현실은 냉혹하고 도덕이라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감정이 끼어들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 한 명만 죽여도 짐승의 세계이며 전쟁은 수많은 트라우마를 남기고 우리는 지난 이후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합니다. 이 과정은 인류 역사에서 매번 반복하지만 그런 기억은 사라지고 변화에 둔감한 시대가 도래합니다.


    인간 이성은 극한의 대립과 집단의 이익에 의해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덕이 죽은 시대에도 우리는 도덕을 버릴 수 없습니다. 도덕의 장남인 종교는 이미 죽어가고 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은 종교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신성에 대한 의구심에 불을 지핍니다. 그런 와중에 다시 종교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종교처럼 안정감을 주는 게 필요한 혼란하고 혼탁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수많은 실패와 실망에도 우리는 도덕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도덕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면 인류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도 도덕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29. 유아교육이 가장 중요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