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의 친구냐 적이냐
정신없이 일 속에 파묻히고,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브런치에 글을 올린 지 2년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AI 신기술들이 하나둘씩 작업에 영향을 미쳐왔던 지난 2년, 돌이켜보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아직까지 AI기술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전 시대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생산성과 창의성을 실현시키는 도구이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현시점에서 AI기술이 나의 광고음악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를 망각하기 전에 가볍게 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어떤 여성 소프라노가 있다. 광고주는 그 소프라노의 음원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 했으나 비용과 현실적인 문제로 제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그 소프라노의 음색과 표현을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오픈소스 어플인 replay로 그 소프라노의 음색을 트레이닝했다.
광고음악은 저작권 관련 문제가 예민한 분야이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에는 AI데이터 마이닝에 대한 저작권이 확립되기 이전 시점이었다. 하지만 향후 불거질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트레이닝 중이던 모델은 폐기하였다. 대신 그 소프라노를 잘 재현하기로 유명한 성악가를 섭외해 녹음을 진행하고, 그 특유의 분위기는 AI기술을 이용한 플러그인을 사용해 최대한 근접하게 연출하였다. 데이터 마이닝을 통한 작업이 아니므로 저작권과 관련된 그 어떤 이슈도 없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후 원곡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증명까지 보낼 정도로 성공적인(?) 작업이었다.
SUNO의 기능은 막강하지만 생산성 측면에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디테일한 프롬프트를 동일하게 구성해도 랜더마이즈 된 창작물이 나오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며 디테일에 대한 수정 보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UNO를 이용하는 영상편집자들은 좋은 음원을 생산해 내는 것이 일종의 가챠(뽑기)라며 농담을 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만족스러운 음원이 생산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가사나 멜로디에 대한 수정이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처음부터 제작을 하는 것보다 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SUNO로 제작된 음원의 가사를 변경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는데, AI로 제작한 음원의 트랙을 AI기술을 통해 분리하고, AI로 생성된 목소리를 AI기술을 통해 재현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SUNO가 만들어낸 음원은 아무리 들어봐도 '볼빨간 사춘기' 안지영 님의 음원에서 뽑아낸 데이터로 만들어낸 곡인 것만 같았다. 일단은 그 음색과 최대한 흡사한 가수를 섭외해 AI가 만들어낸 보컬과 최대한 흡사하게 녹음하였다. 그리고 데이터 마이닝에 따른 저작권 논란을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Dreamtronics사의 Vocoflex에 관련 음색과 관련된 데이터를 입력시킨 후 최대한 비슷한 목소리로 연출하였다.
생산성과 비용절감을 위해 선택한 AI콘텐츠가 결과적으로는 애초의 목적에 별반 부합하지는 않으며 AI기술을 사용할 시 그에 상용하는 또 다른 AI툴이나 기술이 필요한 것을 여러모로 재확인한 순간이었다.
어렵사리 가수가 녹음을 했는데 간단한 단어의 수정을 하기 위해 먼 거리의 작업실까지 다시 오라고 하는 건 꽤나 미안한 일이다. 이럴 경우 가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앞서 언급한 Replay라든가 Musicfy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 가수의 모델을 트레이닝한다.
보컬 트레이닝의 경우 원 가창자의 음색, 고유의 표현이나 창법뿐만 아니라 사용된 마이크와 아웃보드의 질감 또한 그대로 트레이닝되므로 핸드폰을 통해 녹음을 받거나 다른 환경에서 녹음을 하더라도 거의 흡사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얼마 전 진행했던 작업의 경우 단어가 하나씩 바뀌며 수정되더니 결과적으로는 내가 수정을 위해 녹음한 분량이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곡에는 각기 다른 발성과 표현법이 필요하니 AI트레이닝된 보컬의 모델이 있다 하더라도 가수분 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챗GPT의 도움을 받아 영어가사를 쓰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의 작업에 있어서 GPT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양 환경과 관련된 기업 캠페인의 음악인데, 해적의 호방함, 신비로운 자연현상, 대항해시대의 낭만과 같은 이미지가 하나의 목소리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사가 중요했고, 이런저런 서치를 통해 윌리엄 워즈워스의 작풍을 가사로 만들기로 하였다. 과거 대항해시대의 각 나라의 뱃노래와 민속음악, 음유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평균화 내어 곡의 가사를 썼으며, 음률과 박자, 발음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단어의 표현으로 보완 수정해 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AI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음악감독 본연의 역할 즉, "음악제작의 방향을 설정하고 통괄하고 책임지"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AI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방향설정', '통괄', '책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AI기술로 인해 나의 생산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위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트리스트의 성우 생성기능, 보컬로이드의 보컬생성 기능 등 정말 다양한 AI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는 혼자만의 힘으로 콰이어 곡을 제작할 수 있고, 간단한 표현이라면 스스로 가수가 되어 녹음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또한 결과의 완성도를 놓고 본다면 전통적 작법의 결과물을 따라가기 힘들다.
하지만 기존작법과 AI기술 양쪽에 풍부한 지식과 기술, 경험이 있다면 곡 제작에 필요한 원가와 기간을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줄여줄 수 있으며,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작업을 가능케 한다.
특정 아티스트의 음색을 그대로 재현하길 원한다면 저작권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것을 재현해 낼 수도 있다.
이전 시대라면 영어가사 하나만 하더라도 작사가의 컨디션에 따라 며칠에 걸친 제작기일이 소모되기도 하였는데 이젠 음악과의 더욱 밀접한 연계성을 가진 영어가사를 내가 원한다면 ASAP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아직까지 AI기술은 나에게 있어서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상황이 변화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과 2년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금의 상황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느끼는 바, 아직까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진다.
제작과 기획의 경계가 모호해질 뿐, 선택권자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최선의 예제를 제시한다는 행위는 이전의 본질이었고, 그 본질은 여전히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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