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무릎 꿇지 마라

마태복음 16장

by 신완식

일자: 2025년 1월 9일(목)

제목: 그게 분간이 안 됩니까?

본문: 마태복음 16장 1~4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표준새번역, 2~3절)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나라마다 이른바 극우세력들이 준동할 때가 있습니다. 수적적인 면에서는 분명 다수가 아님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때로 과소평가하기 곤란합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치우쳐있습니다. 유럽의 극우들은 인종차별도 서슴지 않습니다. 백인우월주의 노선을 걷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혐오합니다.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맡기 꺼리는 위험하고 힘겨운 일들을 감당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극우세력이 백인들 사회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은 백인들의 생각과 역으로 맞닿아 있어 보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최근 들어 그야말로 준동하고 있습니다. 극우는 보수와 결이 다릅니다. 보수는 상식적인 면을 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와 토론이 가능합니다. 보수는 염치를 압니다. 최소한의 양식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자국과 자국민의 이익을 깊이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극우는 이익중심입니다. 이념이 없습니다. 가치와 상식은 개에게 던지는 밥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입니다. 몰역사 몰현실적입니다.


엊그제 교역자 월례회에서 1부 예배를 마치기 전 축도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원로이신 목사님께서 축도를 하시기 전 한 말씀하겠다고 하셔서 우리들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작금에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쁜 일정임에도 어르신 목사님께서 시국을 염려하시니 인내로 들어드렸습니다.


그런데 자꾸 말씀이 삼천포로 빠져가기 시작했습니다. 6.25를 김일성이 일으킨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누가 공산당을 좋아하겠습니까? 저도 수차례 밝혔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습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반대합니다. 나는 전쟁을 강력히 거부합니다. 평화와 정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다음부터 마치 딴 세상사람 같았습니다.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고자 광화문에도 자주 다녀오는데 우리나라는 간첩들이 사방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들어서면 교회는 다 없어지고 말 것인데 문재인 전 대통령이(그분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문재인이가) 간첩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분이 80대 어른이시라는 점에서 그냥 넘어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명문대학교 교수들 중에서도 극우의 첨병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신학대학교의 교수 한 분도 요즈음 그 노선에 서서 맹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서는 유익한 책도 펴냈고 나름 논문도 쓰곤 한 분인데 현실인식에 있어서는 그냥 극우입니다.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하는 이들 중에서도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아 참 안타깝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을까요?


일자: 2025년 1월 10일(금)

제목: 이러면 다를 게 있을까요?

본문: 마태복음 16장 5~12절

<“내가 한 말은 빵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제야 그들은 예수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공동번역 개정판, 11~12절)

시대마다 지역마다 종교는 있었고 제 종교에는 사회적으로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었습니다. 순기능을 한 종교는 받아들여졌고 그렇지 못한 종교는 현저히 그 힘이 약화되거나 사라졌습니다. 물론 자취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 경우도 있지만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만 늘 다니는 분들은 세상이 온통 십자가로 물들었다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들께는 아쉽게도 여전히 기독교는 전 세계를 주도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한 때는 기독교 국가였던 나라들 중에서 더 이상 그렇지 못한 예도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슬림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미약한 처지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 민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때는 불토국을 꿈꾸었습니다. 정치 교육 문화 행정 전 분야에서 불교가 대세였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이 민족복음화를 염원하며 기도하듯 당시 불교인들 또한 그랬습니다. 그분들은 불교만이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순기능을 감당할 때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는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나라를 좀먹는 종교와 사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불교는 당시 사회로서는 암 덩어리 같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때 민족종교로서 권력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민초들에게까지 두루 존경과 사랑과 신뢰를 받았지만 더 이상 미련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부패한 권력과 손잡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권력을 후원하고 지지하는 종교권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권력을 향하여 준엄한 책망과 꾸짖음을 내리는 대신 더러운 손을 맞잡고 말았습니다. 재산불리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달콤한 꿀만 빠는 마약 같은 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불교가 역사로부터 내동댕이 쳐진 곳을 공맹사상이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에는 매우 신선했습니다. 참신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와 같았습니다. 불교로 인해 더럽혀진 이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개조하고 쇄신하며 새롭게 하는 일에 안성맞춤이라 생각됐습니다. 그리고 상당 부분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갔습니다. 초기 불교와 마찬가지로 사회와 공동체에 순기능을 할 때는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갈수록 처음 정신이 퇴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유교 또한 타락한 권력을 향하여 준엄한 책망과 꾸짖음을 내리는 대신 더러운 손을 맞잡고 말았습니다. 재산불리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달콤한 꿀만 빠는 마약 같은 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최근에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러 고등종교들 가운데 신뢰도가 가장 낮은 종교는 개신교였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과도한 전도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입니다. 선교 초기에 개신교회는 우리 사회에 소중한 순기능을 많이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맛을 잃어갔습니다. 향기 대신 악취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주의가 판을 치고 권력과 손을 잡는 바알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요 소금이라 하신 것은 결코 빈 말씀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일자: 2025년 1월 11일(토)

제목: 함부로 무릎 꿇지 마라

본문: 마태복음 16장 13~20절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표준새번역, 18~19절)

우리 개신교회는 신앙고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의 기초와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 신앙고백의 기초와 뿌리가 되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나와 있는 베드로의 그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지금이야 세례를 받기 위해서라도 이 구절을 암송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2,000년 전 초기 기독교도들에게는 엄청난 용기와 결단과 희생이 요구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주(主)요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황제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격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입으로는 황제를 신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호칭들을 예수님께 적용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겠지요. 우리는 제국주의를 거부합니다. 폭압적이며 폭력적인 절대군주 앞에 무릎 꿇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독재자들이 벌이는 야만적인 전쟁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정의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황제를 신격화시킨 후 그를 따르도록 세뇌시키는 일체의 조작행위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한 사람의 절대군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자비와 긍휼을 바라봅니다.


이런 결단이 어찌 그때에만 적용된다 하겠습니까? 지금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맞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제국주의를 꿈꾸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미국을 위시해서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다시 힘이 강해지면 그러지 않을까요? 군사 외교적으로는 다소 덜 노골적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이 주요 강대국들의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로마와 같은 고대 세계의 제국들을 무너뜨리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제국주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내포하는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함부로 무릎 꿇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신제국주의, 패권주의, 다국적기업, 군산복합체, 맘몬니즘, 권력지상주의, 불의, 부정, 부패, 차별, 독단, 독점, 독재, 부익부빈익빈 체제, 극단적 무한경쟁 등과 같은 힘 또는 조직이네 체제, 사람 등일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이념이나 체제도 교회가 무릎 꿇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하며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 외 모든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시오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일자: 2025년 1월 12일(주일)

제목: 위국헌신군인본분

본문: 마태복음 16장 21~28절

<그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표준새번역, 24~25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제가 60 평생을 살면서 호랑이가 가죽을 남긴 것을 본 일은 없습니다. 호랑이도 동물원에서나 가끔(제 평생에 열 번도 안 될 것 같네요.) 보았습니다. 그러니 가죽 이야기는 제게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사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서울과 대전에 각각 있는 현충원에 가보면 정말 실감이 납니다. 누워계시는 고인들의 이름과 삶과 얼굴은 잘 모르겠지만 이름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제 장인의 유해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데 이름 석 자는 또렷이 새겨져 있습니다. 물론 사위인 제 이름도 그렇고요. 그러니 사람이 죽으면 확실히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어떻게 기록되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이름 석 자 딸랑 그 자체가 뭐 그리 중요할까요?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가 핵심 아닙니까?


아직 관람을 하진 못했지만 제 친구 목사들 몇은 극장에서 보고 온 모양입니다. 요즘 가장 뜨고 있는 우리 영화 <하얼빈!> 무척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친구들 단톡에서 적극 추천하는 것을 보고 그 열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 장군! 대한독립군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그는 의사가 아닌 장군이었습니다. 대한의 참 군인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군인이라는 자긍심과 정체성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남겼습니다. 명절에 아들과 며느리가 내려오면 꼭 함께 관람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이들도 이름을 남겼습니다. 개도 아니고 돼지도 아니며 소도 아니었기에 이름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기 그지없는 더러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을사오적. 모두들 당대의 엘리트라 불렸습니다. 판사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호의호식한 매국노들입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조상들이 물려준 썩은 냄새 가득한 유산 덕분에 결코 아쉽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만 그들은 영원한 죄인들의 자손입니다.


이름을 남기기는 하는데 한 편에서는 무한한 감사와 자부심과 자랑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영원히 부끄러운 사람들이 됩니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십자가를 지느냐 않느냐? 을사오적들은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대신 금목걸이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격이었습니다. 뭇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사로잡으며 온갖 혜택을 다 누리며 살았습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같은 분들이 무겁고도 날카로운 십자가를 지고서 피를 흘리며 걷는 동안에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리 신앙세계에서만 국한되는 원리는 아닙니다. 병든 정신을 가진 극우집단이 높이는 이름은 지금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세월이 흐르면 다시 을사오적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입니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안중근 장군이 보인 정신과 삶은 결국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역사가 검증하는 진리입니다.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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