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5년 1월 4일(토)
제목: 말하는 대로 살아야지
본문: 마태복음 15장 1~11절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는 바로 너희를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공동번역 개정판, 7~8절)
제 아내는 어느 유명한 배우가 나오면 즉시 채널을 돌려버립니다. 그는 보통 유명한 배우가 아닙니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미국 어느 방송국과 인터뷰하는 것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는데 실력이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잘 생겼고, 액션 연기도 뛰어나고, 선한 역할과 악당 역할 가리지 않고 잘하는 것 같습니다. 멜로물에도 잘 어울리고요.
저도 아직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아내는 배우의 실제적인 모습이 영화와 많이 다르면 위선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자기 아내가 임신을 한 상태인데 다른 여자랑...’ 노발대발!
아내는 꽤 오래전 일인데도 여전히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만큼 멋진 상남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과거적 현실은 전혀 그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나오는 영화를 큰 문제없이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도 아내에게서 그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그런지 저도 마음이 가끔은 흔들리곤 합니다. ‘아! 저 놈이 그런 놈이야?’
정말 신뢰하기 어려운 이들이 정치인들 같습니다. 말은 얼마나 번지르르한지요! 말과 실제가 다른 대표적인 직업군이 정치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단 한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또 ‘휴일도 없이 일하고, 그렇다고 뒤로 무슨 이상한 거 받은 것도 없는 분들인데도 어떻게 이런 데 말려서 여러 가지 고초를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많이 마음이 아프고….’
하지만 그는 결국 탄핵이 되어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역사상 대단히 무능하고 부끄러운 지도자들의 이름에 올랐습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얼마 전 국회에 의하여 직무가 정지되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윤석열 씨는 과거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바라는 민심은 정치신인인 저를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며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라고 밝혔다.
공정과 상식. 누군가 만들어준 캐치 프레이저이겠지만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불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불공정과 몰상식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사람은 소수의 핵심지지자들 뿐입니다.
나라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삶을 걱정하는 일 또한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랑은 누가 못합니까?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볼모로 삼거나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나라사랑을 노래하는 일은 그야말로 위선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말한 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속임수일 뿐입니다.
일자: 2025년 1월 5일(주일)
제목: 보통 정성으로는 안 됩니다
본문: 마태복음 15장 12~2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사람이면서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표준새번역, 13~14절)
저는 채운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아담한 규모의 농촌교회입니다. 어르신들이 다수이지만 감사하게도 자립교회입니다. 필리핀에 있는 어느 선교사에게 매달 일정액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나라에 IT대학을 설립하고자 수년 간 애쓰고 있습니다. 모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 교수 출신답게 본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추진 중이라 믿음이 갑니다.
지방회 내에서 자립하지 못한 교회를 위해 우리 교회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를 매달 후원하고 있기도 합니다. 매 연말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마다 우리 교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어려운 중에도 최선을 다하여 헌금하시는 모습에 제가 도전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덕분에 2024년에도 우리 교회는 큰 어려움 없이 오히려 풍족하게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자화자찬을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중이 아닙니다. 제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경상비와 특별헌금을 합쳐서 채 2억 도 되지 않는 예산이지만 저는 한 푼이라도 허투루 사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엇보다도 지출할 때마다 영수증을 첨부하여 제정부에 제출하고 있습니다. 물론 입원환자를 심방할 때처럼 예외적인 경우에는 영수증 제출이 안 되지만요. 물론 다른 대부분 목회자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주중에 자신의 생업과 일상에 집중하느라 의외로 교회 일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홀로 목양을 하므로 부교역자와 사찰 및 사무직원 역할도 겸합니다. 종이컵이 떨어졌는지, 화장실에 휴지와 비누는 잘 유지되고 있는지, 커피 믹스는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어르신들이 즐겨 마시는 차는 얼마나 남았는지 수시로 확인합니다. 연성 쓰레기봉투와 재활용 및 음식 쓰레기봉투도 떨어지면 즉시 구입해야 합니다. 승합차 두 대 정기검사 및 엔진오일 교환, 형광등 교체, 눈 치우기도 하고 최근에는 로봇 청소기 조작도 매주 한 두 차례 실시하면서 교회 청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토요일에는 주보 편집과 프린트 작업을 하느라 반나절을 보냅니다. 혼자서 새벽기도회 설교와 수요일 및 주일 오전오후 설교를 담당합니다. 요즘처럼 연말연시에는 사무총회를 준비하랴 지방회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랴 제법 분주합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 때는 차량운행도 합니다. 최근 이틀간은 조금 무리가 되었던지 갑자기 코피까지 터지더군요.
이렇게 아담한 규모의 교회를 이끌고 가는데도 정성이 필요하고 헌신과 충성이 절실합니다. 틈틈이 결석한 성도들을 파악하여 전화를 하거나 심방하는 일도 제 몫이고, 입원환자가 생기면 달려가야 합니다. 장례식이라도 집전하여야 하는 일이 발생하면 부가적인 업무가 주어집니다. 물론 저는 기쁨으로 감당하지만 말입니다. 나아가 감찰회와 지방회 소속 여러 단체나 모임 관련 일도 처리해야 합니다. 남들은 ‘저 목사는 밥 먹고 뭐 하나?’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저대로 분주합니다. 어떨 때는 솔직히 휴가가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 나라를 책임지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국정에 임해야 할까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지극정성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자: 2025년 1월 6일(월)
제목: 운명을 개척합시다
본문: 마태복음 15장 21~28절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표준새번역, 27~28절)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서 만난 가나안 여인! 음미할수록 정말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어 집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 중에 어찌 뵙고 싶은 이가 이 여인뿐이겠습니까? 하지만 그중에서 이름 없는 이 여성에 대해서도 대단히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떻게 생겼을까요?
제가 이 가나안 여성이 궁금해지는 이유는 대단히 간단합니다. 저 같은 그토록 푸대접을 받고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했으면 속이 상하거나 절망스러워서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인격적으로 짓밟혔다는 상처를 받게 되었다면 어지간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될 것입니다. 사람 마음속에는 자존심이나 수치심이라는 커다란 방어막이 있잖습니까?
교회를 다니다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서 영영 교회를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군에 입대하기까지는 학생회 회장이다 뭐다 하면서 대단히 열심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에서 교회 다니던 선임에 의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 다시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듯 칠순이 훌쩍 넘어선 연세가 되었는데요.
지금은 열심히 목회하고 있는 제 친구 하나는 의무경찰로 입대했다가 나이가 어린 선임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어린 선임이 모 신학대학에 다니다 왔다고 합니다. 1980년대 중반 때의 일이니 선임들의 횡포는 그야말로 전설 속에 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 친구는 앞서 말씀드린 지인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루는 날을 잡아 화장실로 불러냈답니다. 그리고는 작정하고 패버렸다고 합니다.
‘네가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나도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너의 그 비인간적인 행동을 참을 만큼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매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다시는 다른 의경들에게 이런 나쁜 짓을 하지 마라.’
자신이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상급자에게 고자질했으면 문제가 커졌을 테지만 당시만 해도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라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은 하급자를 패준 용기 있는 친구는 제 베프 중에 한 명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크게 받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해 보입니다. 끙끙 앓거나 좌절하다가 낙심천만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제 친구처럼 두들겨 패서라도 악조건을 극복해 나가는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신앙세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는 찬송가 460장 가사를 참 좋아합니다. 가사와 똑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흉내라도 내려고 노력한 적은 적지 않았습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아멘.’
가나안 여인은 이 가사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명을 극복한 여성.
일자: 2025년 1월 7일(화)
제목: 많이 굶어보셨던 것 같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15장 29~39절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공동번역 개정판, 32절)
굶어본 사람만 허기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 끼만 굶어도 어지럽습니다. 즐거움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권사님 한 분께서 정성스레 주신 떡국을 즐겨 먹고 있습니다. 또 다른 권사님께서 주신 고기국물을 곁들인 끝내주는 떡국 맛을 아내는 전혀 모릅니다. 당뇨병 재발 방지하기 위해 아내는 전혀 먹지 않거든요. 그러니 전부 제 차지입니다. 하하! 아무도 제가 먹을 것을 탐내지 않는 이 상황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사흘을 굶었다니! 한 끼도 굶지 못하고 먹어대는 저로서는 정말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허기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가난했던 신학생 시절 제법 굶어보았고 목회하면서 21일 금식기도를 두 번이나 실시해 본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최근에는 별로 굶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먹성이 더 좋아져서 저는 하루 세끼를 거의 챙겨 먹습니다. 물론 양이 제법 줄었고 집에서는 가급적 채식을 하려고 노력 중인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람이 참 묘하지요? 과거에 제법 굶어봤던 경험이 있지만 지금은 허기지지 않으니 저 자신 남의 텅 빈 배에 대해서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은 솔직히 먹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습니까? 물론 공짜로요. 이런 모임 저런 모임 참석하면 밥은 여지없이 그냥 먹게 됩니다. 누가 그러잖아요? 목회는 먹회라고.
예수님께서도 굶는 것에 대해서는 이력이 나신 분 같습니다. 공생애를 40일 금식기도로 시작하셔서 누구보다 잘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굶주리신 틈을 마귀가 공략했다고 하잖습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 아들이시라면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시오. 얼핏 보면 돌이 떡처럼 보이기도 하겠습니다. 40일 간이나 금식하셨으니 세상 모든 것이 다 먹음직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전봇대로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만용이 다 생기더군요. 겨우 21일 금식한 것인데요.
예수님께서는 정말 사람들을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이런 지시는 본인이 직접 굶어보지 않고서는 내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굶주린 이들의 그 절박함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직접 굶어보셨기에 공감하신 것입니다. 안타까움, 연민의 정, 측은지심, 긍휼, 자비 이런 단어들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 적합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공감능력은 비단 배고픈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선 본문에도 그래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이와 맹인과 지체 장애자와 말 못 하는 이와 그 밖에 아픈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와서, 그 발 앞에 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표준새번역, 29~30절) 배고픈 사람들, 각종 질병으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 모두가 예수님께서 측은히 여기신 이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