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4년 10월 24일(목)
제목: 정말 다행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1장 1~17절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암미나답을,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았으며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공동번역 개정판, 3~6절)
이 족보를 읽다 보니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이 하나 떠오르는군요. 저는 고등학생 때 미션 스쿨을 다녔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목사님 교감 선생님은 장로님. 두 분을 필두로 대부분 교직원들이 장로 권사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중에 국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서는 유난히 암기력이 뛰어나셨는데 세상에. 읽기도 어렵다는 마태복음 1장 속 족보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술술 외우시는 것이 아닙니까?
“얘들아! 너희들 중에 혹시 지금 신약성경 가진 사람 있냐? 마태복음 1장을 펴서 1절부터 17절까지 읽어라. 나는 암기할 테니 누가 더 정확하고 빠르게 하는지 시합해 보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생님이 이기셨습니다. 정말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고 빠르게요. 읽는 급우는 몇 군데서 버벅대거나 헤맸습니다. 와! 60여 명의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선생님이 다시 보이시더군요. 암기 왕! 지금도 인정합니다. 정말 똑 소리 나는 선생님이셨는데 송구하게도 성함이 흐릿하네요. 용모는 또렷하게 기억나는데요. 박 씨 성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족보와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소재로 설교하기 시작하면 몇 달도 걸릴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을 통째로 다 강론해야 할 것이고요. 저는 이 중에서 여성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정말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이지요. 지금 기준으로 하면 비난받고 손가락질당하기 안성맞춤인 여성들. 그런데 그들이 떡하니 예수님의 ‘거룩한’ 족보에 당당히 올라있습니다.
다말은 비운의 여성입니다. 첫 남편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가 죽었고 시동생은 계대결혼을 거부다 흔히 말하듯 천벌을 받아 죽습니다. 막내 시동생은 아직 너무 어려서 대를 이을 방법이 없자 창녀로 변장하여 시어버지인 유다를 통하여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제야 운명이 밝아졌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 출신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신성분은 기생이라고 합니다.
룻도 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비운의 여성이었습니다. 외국인 여성으로 유대 사람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는 바람에 시어머니를 따라 남의 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남편이 죽었으니 룻은 살았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다 부유했고 사회적으로 저명했던 보아스가 거두어준 덕분에 역시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의 충직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솔로몬의 어머니지만 사실상 다윗과는 불륜관계였습니다. 다윗이 저지른 일방적인 성범죄라고도 볼 수 있지만 평소 권력과 신분상승에 욕심이 있었던 그녀가 짠 판에 다윗이 걸려든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과는 불륜이었습니다. 한 때 이런 경우는 평생토록 주홍글씨가 새겨졌습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라면 과연 이런 여성들이 이토록 귀중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이름이 거론되지 마자 SNS에서 융단폭격을 맞고 좌초됐을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다행입니다. 출신성분을 따지고 차별하는 시대와 사람들 가운데서도 꼿꼿하게 살아남아 존중받게 되었으니까요.
일자: 2024년 10월 25일(금)
제목: 그리운 아버지
본문: 마태복음 1장 18~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공동번역 개정판, 18~19절)
제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선친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선친께서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일 때 환갑을 목전에 두고 별세하셨습니다. 제가 어렸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랑 축구를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고향 마을에서 축구공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돼지 오줌통을 불어서 또는 볏짚을 둘둘 말아서 아이들끼리 공을 차곤 했는데 아버지와는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초중 고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에 오신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제 일상을 기억할 수 있는 때로부터 함께 어디를 여행 간 기억이 없습니다. 육 남매 중 다섯째이고 나이 40이 넘어 저를 낳으셔서 그런지 저를 때리시거나 혼을 내신 기억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란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뒷산에 나무하러 가실 때 가끔 저를 데리고 가신 기억은 있습니다. 공부를 잘했다고 칭찬 들은 기억도 흐릿하고 그렇다고 성적이 좋지 않다고 야단맞은 일도 기억에 없습니다.
선친의 임종을 지켜본 저는 마지막 순간에 펑펑 울지 못했습니다. 고3 수험생으로서 한참 공부할 때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래 제 감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는지 무덤덤했습니다.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런 경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표현하곤 하잖습니까? ‘아버지!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요? 우리 식구들만 이렇게 남겨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뭐 그런 식의 장면은 제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요? 사실 영화 별로 많이 못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25세에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나름의 아쉬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결혼 36주년이 되고 제가 환갑을 맞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로부터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저는 지난날 나름대로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두 아들이 저를 회상할 때 그래도 제법 추억이 있는 아버지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제 아내는 시아버지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며느리에게 좋은 시아버지가 되기를 나름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 사랑을 충분히 받은 며느리로 훗날 저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생각만큼 그리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저는 제 둘째 아들도 최대한 빨리 결혼했으면 합니다. 벌써 만 34세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점이 너무 아쉽습니다. 제가 손주들 군대 가는 모습을 보고 싶고 면회도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제 나이 80이 넘어야 겨우 그럴 수 있겠으니 말입니다. 본래 제 나이가 50세가 되기 전에 손주들하고 축구하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는데 벌써 불가능해졌습니다. 둘째 며느리도 많이 많이 사랑해 주는 시아버지가 되고 싶은데요.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아버지 요셉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 말입니다. 저처럼 서로 추억이 많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셨을까요? 알려진 바로는 요셉은 예수님께서 비교적 어렸을 때 별세하셨다는데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거나 회상하시는 대목이 없어 무척 아쉽고 서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