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4년 10월 26일(토)
제목: 별이 멈추었다니
본문: 마태복음 2장 1~12절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표준 새 번역, 9절)
어제와 오늘 새벽하늘이 얼마나 맑던지요!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별들이 반짝대는 모습에 제 마음이 얼마나 심쿵심쿵 거렸는지 모릅니다. 밤하늘과 샛별! 분위기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동일한 별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틀 동안 넋을 잃고 별을 쳐다봐서 그런지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별이 나타나 인도했다. 아기가 있는 집 위에서 별이 멈추었다. 이게 가능한가요? 제가 바라본 샛별들은 하늘 저 위 너무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반짝거림은 별에 따라 달랐고요. 아무리 봐도 움직인다거나 또는 가까이 다가온다거나 하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며 이동하는 물체는 별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들이었습니다. 물론 한 두 대가 아니고 여러 대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별이 사람을 인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제가 평소 천체 또는 천문학에 관한 책을 읽지를 않아서 챗 GPT에서 몇 가지 사항을 물어보았습니다.
(질문 1) 밤하늘 혹은 새벽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어느 별이며 몇 광년쯤 떨어져 있나요?
(대답) 밤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 다음으로 약 4.24 광년 떨어진 프록시마 센터우리(Proxima Centauri)입니다. 프록시마 센터 우리는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삼중성계에 속하는 적색 왜성으로, 우리 태양계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항성입니다.
프록시마 센터 우리는 지구에서 가까운 만큼 관측이 용이한 별 중 하나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두운 별이라 맨눈으로는 관찰하기 어렵습니다. 망원경을 통해서만 관측할 수 있으며, 특히 천문학에서 큰 관심을 받는 이유는 이 별이 행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2)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별이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다가 아기 예수께서 누워있는 집 위에서 멈추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천문학적으로 가능한가요? 문학적 또는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대답) 예수 탄생 시 별이 동방박사들을 인도해 아기 예수께 멈췄다는 이야기는 주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문학적으로 별이 특정 위치에서 멈추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별들은 지구에서 볼 때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하루와 계절마다 위치가 달라지므로, 특정 장소에서 멈추는 별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베들레헴의 별'에 대한 몇 가지 자연적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행성의 대접근 (대합 현상): 기원전 7년경 목성과 토성이 매우 가깝게 접근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이 현상은 매우 밝고 눈에 띄기 때문에, 동방박사들에게 중요한 징조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행성의 역행 운동: 행성이 밤하늘에서 잠시 멈춘 듯한 운동을 하는 역행 현상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특정 행성이 한 위치에 멈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위치를 명확하게 지시하거나 특정 장소에서 멈춘 것은 아닙니다.
3. 혜성: 기원전 5~4년경에 혜성이 관측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혜성은 밝고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듯한 착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설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해석에서는 이 사건을 예수 탄생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이야기로 보기도 합니다.
일자: 2024년 10월 27일(주일)
제목: 목숨 가지고 장난치지 마요
본문: 마태복음 2장 13~23절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공동번역 개정판, 16~18절)
이 같이 천인공노할 만한 비인간적이고 폭력의 극치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이에 대한 것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입니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두 가지 주장 모두 여러 정황과 역사적 연구에 토대를 둔 것이겠지요?
헤롯대왕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그가 유아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모세가 유아시절에 겪었던 그 일을 끌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거짓말까지도 서슴잖게 해대는 책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관련된 일을 통해 설명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요.
만약 이 일이 사실이었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지만 헤롯 대왕은 저 무저갱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가두어두어야 할 자가 아닐까요? 그걸 어떻게 용서합니까? 죄송했습니다. 이런 한 두 마디 말로 그 죄를 씻을 수 있을까요?
유아들을 살해하라! 이런 명령이 실행되었을 때 아이들 부모가 받았을 상처와 아픔을 생각해 볼까요? 돌아오는 화요일인 10월 29일은 이태원 참극이 벌어진 지 만 2년이 되는 날입니다. 무려 159명의 무고한 생명이 압사당했지요. 그중에는 K문화가 좋아 이역만리타국에서 달려온 젊은이들도 있었고 모녀가 한꺼번에 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희생자 어머니는 여전히 가슴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으셨더군요. 딸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죽음에 대하여 설명하는 한 마디 한 마디 속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 분노와 회한의 감정이 묻어 나왔습니다. 그것은 피멍이었고 피투성이였습니다. 그 어머니 가슴에는 칼과 창과 몽둥이에 깊숙이 찔린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딸을 가슴에다 묻었는데요. 그분이 대담을 마치고 나가기 직전 이러시더군요. “이렇게 대화하고 난 후 밖으로 나가면 제 아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상처는 그 어머니가 하나님 품에 안겨서 영원한 위로와 안식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아물게 될 것 같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릴까 봐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이런 유의 무지막지한 국가폭력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닐 때가 있습니다. 권력자 자신이 저지른 다양한 부정과 비리를 감추고자 엉뚱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때가 있습니다. 국민적인 지지가 현저히 떨어지는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임을 감추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낮고 힘없는 이들을 제물 삼아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권력이 뭐라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 잡듯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권력자들을 가만 두지 마십시오. 그들 때문에 채 꽃 피우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너무도 억울해서 못 견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