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세계에서 표절 논란이 가끔 벌어질 때, 당사자가 금방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는 드문 편인 것 같다. 표절이란 게 의도적인지 아니면 창작자의 무의식에 저장되었다 재생산되는지가 불분명한 측면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는 하다. 하여간 논란이 깊어지고 나면 그 창작자는 어느새 시야에서 멀어지고 그의 작업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표절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한 검증이 끝나지 않아도 여론의 거부라는 재판을 받게 되는가 보았다. 나는 이런 현상이 창조적 직업에 대한 책임을 창조하는 자와 사용하는 자에게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대중음악, 출판 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를 많이 접했다.
추상화가로서 나는 시각예술에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게 되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사실 시각예술이 다른 산업 분야에 응용되어 쓰이는 경우에 작가에게 저작료를 지불하는 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드물고, 설사 썼다 하더라도 이행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예를 들면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디자이너가 젊은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자신의 디자인 제품에 무단으로 쓴 경우 같은 일이다. 그 갈등은 결국 소송전으로 가고서야 대외적으로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디자이너들의 논리는 (유명한) 내가, (무명인) 너의 작품을 홍보해주지 않느냐는 것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저작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11년 대학원의 후배가 시의 정책자금으로 일인 기업활동을 할 때부터였다. 그 후배는 당시 미처 시각예술계에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저작권 문제를 실천적으로 점검하고, 진행하는 것을 사업모델로 하겠다는 지원서를 써서 정책자금을 받았다. 후배인 사업체 대표는 작가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저작권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작가들과 계약서를 쓰고 제품을 만들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공유했다. 당시로서는 말로만 존재하던, 시각예술가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절차를 실제로 밟았다는 데 그 사업의 의미가 컸다. 나는 당시에 대표와 저작권 게약을 하고 제품 생산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만약 신뢰하는 그 후배와의 계약이 아니고 낯선 대상이었다면? 하고 생각해 보니 의문점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작품의 이미지를 사용한 제품을 만든다고 하였을 때 작가가 생상과정에 관여하거나 이익을 배분하는 점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이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작품의 전체 이미지를 다루지 않고 부분적으로 사용했을 때 작가는 자기 작품을 제품에 썼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혹은 제품 제작자가 이런 경우 작가의 작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차용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계약 기간 중에 제품 생산의 양적 문제는 어떻게 합의를 보아야 하는지,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판매하지 못한 작품이 계속 유통되고 있다면 그 계약은 연장되어야 하는 건지, 하나의 작품이미지로 복수의 제품 혹은 다량의 제품을 만들 때 작가는 그 사실여부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
영혼을 갈아 넣다시피 하면서 최초의 사업모델을 수행했던 후배 사장님은 본인이 목표했던, '산업적 측면에서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사업 목표를 잘 달성하였다. 그는 안경통과 우산, 골프복, 골프용품 그리고 스카프 등에 작품을 적용했다. 제품은 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후배는 이 작업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모든 제품에 작가의 작품 전체 이미지와 사인이 반드시 들어가게 디자인했다. 그는 아마 소비자에게 작품이 들어간 디자인 제품을 쓴다는 기쁨을 주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제품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 제작과정을 화제로 삼는다. 그리고 그때 샀던 아트상품들을 아직도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을 때 작품이 일상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 일인지 깨닫는다.
저작권에 대해 막연하기만 했던 14년 전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현재는 그것이 문제 되는 상황도 다양해졌고 저작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알고 있다. 누군가의 정신적 생산물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 그것을 침해했을 때 일어나는 분쟁들이 그 반증이 되리라.
그런데 누구나 인공지능을 이용해 이미지의 합성, 생산이 가능한 현대사회에서, 나는 콘텐츠 생산자로서 저작권을 좀 더 유연하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전시회를 가면 사진 촬영이 안 된다는 안내문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일들이 확연히 준 것 같다. 관객들이 이미지를 SNS 같은데 확산시킨 것이 결과적으로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아마 시각예술이어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음악회나 공연 같은 경우는 최근에 더 엄격해져서 공연장에서 어떤 촬영도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결국 콘텐츠의 소비방식이 저작권 문제에 대한 민감도를 결정하는 것 같다. 미술작품의 경우는 관객이 본다고 해서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원의 경우에는 그 본질이 듣는 것이므로 경험 자체가 소유 행위가 되는 콘텐츠이다. 그러니 상업성 자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이 문제에 대한 경계선은 '상업적 목적이냐 아니냐'에서 그어져야 할 것 같다. 콘텐츠 사용자 혹은 소비자가 창작물을 향유하거나 확산시키는 것이 창작자의 콘텐츠를 널리 알리는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하므로, 콘텐츠 사용자가 상업적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경우라면 작가는 그 순기능을 보상으로 보고 어느 정도 너그럽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상업적 목적으로 콘텐츠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저작권에 대한 보상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창작자의 이 권한이 인정되고 그것이 그들에게 현실적 보상으로 돌아갈 때, 더 질 높은 창작물에 대한 의욕이 커지게 된다. 결국은 그런 의욕들이 넘칠 때 우리 사회는 보다 더 풍부한 창작자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최근에 불붙듯이 일어난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도 결국 우수한 콘텐츠가 풍부해졌을 때 증폭되었다. 나는 장기적으로 볼 때 창작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나아가 국부를 키우는 일이 되리라고 본다.
이제 인류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문화의 새로운 소유 방식의 시대가 열렸다. 이에 발맞추어 새로운 방식으로 콘텐츠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더 깊고, 더 촘촘한 단계의 협의가 연구,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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