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이겨낸 백색의 재건
내가 소장한 이 두 점의 기물은 조선 도자사의 가장 치열했던 재건기인 17세기 중반, 그 운명의 분기점에 서 있는 유물들이다. 양자검측을 통해 도출된 1664년(강희 초기)이라는 시간은 이 기물들이 두 차례의 참혹한 전란 이후, 무너진 조선의 예법과 기술적 자존심을 다시 세우던 시기의 산물임을 과학적으로 증언한다.
그동안 기존 도자사학계에서 분장백자는 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관요의 체계가 흔들리던 시기에 나타난 과도기적 산물로 치부되어 왔다. 학계는 이를 양질의 백토를 구하지 못한 지방 가마들이 관요 백자를 흉내 내기 위해 고안한 조잡한 모조품 혹은 분청사기의 퇴행적 잔재로 정의하며,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물에 대한 공학적 고찰 끝에 도달한 나의 추론은 이와 궤를 전혀 달리한다.
나의 추정에 따르면, 분장백자는 기술적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전란의 비극을 정면으로 돌파한 지식 공학적 기획의 결과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양질의 백토 수급이 끊기고 가마 체계가 붕괴된 극한의 결핍 속에서, 어떻게든 조선 백자 본연의 결백함을 회복하려 했던 기술적 자구책이자 자존심이 바로 분장백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건의 의지는 구체적인 공학적 팩트로 증명된다. 38cm 중호의 동체부 하단에 남은 뚜렷한 붓질의 흔적은 형식적으로는 분청사기의 귀얄 기법과 닮아 있으나, 그 내면은 전혀 다르다. 어두운 흙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하얀 백토(White Clay) 바탕 위에 다시 정제된 백토 물을 입히는 이중 레이어(Double-layering) 공법을 택한 것이다. 이는 부족한 재료적 토대 위에서 백색의 순도를 물리적으로 끌어올려 조선 백자의 권위를 되찾으려 했던 도공의 사투가 담긴 공학적 설계다.
연작인 소호 역시 마찬가지다. 기물을 백토 물에 담갔다 빼는 덤벙 기법을 빌려와 표면을 매끄럽고 일정하게 다듬었는데, 이는 바닥에 쓰인 玉食(옥식)이라는 명문을 받들기 위한 정결한 바탕의 조성이다. 조선 시대 문헌에서 옥식은 고귀한 제례나 격식 있는 음식을 의미하며, 이 묵서가 400여 년의 세월 동안 백토 분장층 깊숙이 스며든 흔적은 현대의 기술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물리적 증거이자 이 유물들이 17세기 조선백자의 정수임을 확증해 준다.
결국 분장백자는 임진왜란 이후의 촉박했던 상황에서 분청의 효율적인 기법들을 백자 제작 공정에 이식하여 탄생시킨 하이브리드형 지식 공학의 결정체다. 현재 국내외적으로 분장백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한 실정에서, 달정원이 이 분장백자 2점을 소장하고 기록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파편을 줍는 행위가 아니라, 겹겹이 덧칠해진 백토의 두께에서 조선 도공의 의지를 읽고 묵서 한 획에서 지식 공학의 허브를 복원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비록 기물의 본질은 흙일지라도, 분장이라는 기술적 승화와 옥식이라는 정신적 명문을 통해 그 가치는 고결한 존재로 격상된다. 흙은 비겁하지 아니하며 그 기개는 옥보다 견고하니, 이 분장백자들은 영원히 퇴색되지 않는 조선의 정신으로 달정원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