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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Mar 31. 2016

그녀는 오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다녀올게. 이유식은 냄비 안에 있으니까 데워서 먹이면 되고, 8시에 꼭 재워야 해. 울면 코코몽 틀어주면 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

 "이유식은 냄비, 잠은 8시, 코코몽은 티브이에. 걱정 말고 잘 놀다 와.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오늘 당신 참 예쁘다. "   

 짐을 들고 현관을 나서던 그녀가 뒤돌아 말한다.

 "...... 미안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점심때쯤 집에 올 수 있을 거야."




 오늘 그녀는 여고 동창생들과 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딸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밤이다. 딸아이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자, 뭐부터 해야 하나.....

 불안하기는 딸아이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눈빛에 불안함이 가득하다. 딸아이는 그녀가 나간 현관문을 한참 쳐다본다. 딸아이는 나를 더 많이 닮았다. 물론 저 맑고 동그란 눈망울은 빼고. 딸아이의 눈은 그녀를 닮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그 눈에 반해 처음 본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까지 쫓아갔으니까. 그녀의 맑고 동그란 눈망울을 그대로 딸아이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딸아이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아뿔싸.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부엌에서 사과 한쪽을 잘라와 딸아이에게 쥐어준다. 결국 딸아이는 사과 한쪽을 들고 울어버린다. 딸아이를 안아 올려 다독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력을 다해 울던 딸아이의 울음이 그쳐 간다. 아직 마지막 울음을 삼키고 있는 딸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어마. 어~마"

 또다시 딸아이가 엄마를 찾는다.

 "엄마? 엄마는 오늘 친구들이랑 여행 갔어요~~"

 그래, 오늘 그녀는 여고 동창생들과 여행을 갔다.     

 "어마. 어~마!"

 딸아이가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가리킨 건 그녀와 찍은 웨딩 사진이다. 사진 속 엄마도 알아보는 참 똑똑한 아이다. 웨딩 사진 속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하얀 눈밭에 앉아 내 어깨에 기대 있다. 웨딩 사진을 찍던 날에 눈이 많이 왔다. 그녀는 눈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작가를 졸라 예정에도 없던 야외 촬영까지 강행했었다. 그렇게 찍은 한 컷이다. 얇고 여기저기 노출이 심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눈밭을 굴렀으니, 다음날 그녀는 감기에 걸려버렸다. 당시에 그녀는 이미 딸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렇게 심한 감기에도 그녀는 딸아이가 잘못될까 봐 약도 먹지 않고 버텼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미안하게도 뱃속에 있는 딸아이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아이보다, 그녀가 더 소중했으니까.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딸아이를 꼭 안아준다.

 몸서리치며 울어서 딸아이 옷이 젖어버렸다. 감기에 걸리지 않게 옷을 갈아 입혀야겠다. 옷장 문을 열어 딸아이의 옷을 꺼내는데, 그녀의 향기가 났다. 딸아이의 옷을 꺼내 들어 가만히 맡아보는데, 거기서 나는 향기가 아니었다. 옷장 제일 구석에 있는 그녀의 원피스에서 나는 향기였다. 그녀가 좋아하던 원피스. 결혼 후에는 그녀가 그 옷을 입은 기억이 없다. 그래서 결혼 전 아내의 향기가 났구나... 내가 좋아하는 천리향 향기. 딸아이를 임신한 후 그녀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아이에게 안 좋다며. 그녀에게서 항상 나던 천리향은 서서히 옅어져 언제부턴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옷에서 그 향기가 나다니.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가 이 옷을 가만히 입어봤었다. 향수도 뿌려 본건가.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라 멋을 내고 싶었나 보다. 그래, 그녀는 오늘 여고 동창생들과 여행을 갔다.

 벌써 저녁때다. 그녀가 만들어놓은 이유식을 먹이고, 딸아이는 잠이 들었다. 딸아이를 토닥토닥 재우다 나도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보니, 밤 9시이다. 그녀는 잘 도착했을까? 그때 휴대전화 전화벨이 울린다. 딸아이가 깰 까 봐 얼른 거실로 나와 전화를 받는다. 그녀다.

 "나 잘 도착했어. 정신이 없어서 지금 전화했어. 애기는?"

 "밥 먹고, 지금 자고 있어. 당신은 밥 먹었어?"

 "그래? 울고 보채지는 않았어?"

 "응. 당신 가고 잠깐 울더니 금방 그쳤어. 당신은 재미있었어? 뭐하고 놀았어?"

 "그래? 신기하네. 보챌 까 봐 걱정했는데."

 "당신은 재미있게 놀고 있어? 우리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

 "응. 지금 친구들이랑 한잔하려고. 그럼 끊을게. 내일 점심때쯤 도착할 거야. 또 전화할게."

 "응..... 저기... 선아야."

 "응?"

 "나 같은 놈하고 살아줘서 고마워. 내가 너라면 나 같은 놈하고 같이 안 살았을 거야. 장모님이 나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도 알아... 홧김에 회사도 관두고 일 년이나 일자리도 없이 이렇게.....  이제 잘될 거야. 그동안 참아줘서 고마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이제 걱정하지 마. 친구 병철이가 사업을 하나 하는데, 아까 낮에 연락이 왔더라. 거기 한번 가 보려고.. 음.. 그러니까 음... 재미있게 놀아. 미안해..... 사랑해."

 ".... 그래.. 나, 가봐야겠다. 친구들이 찾아. 내일 전화할게. 잘 자."

 "응."


 그래, 그녀는 오늘 여고 동창생들과 여행을 갔다. 아니, 나는 사실 알고 있다. 그녀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 나와 결혼하고는 도통 볼 수 없었던 그녀의 맑은 눈동자, 그녀의 미소, 그녀의 향기가 요즘 들어 다시 나타났다. 늘 나와의 대화에서는 딸아이 얘기뿐이었고, 나의 말은 그녀의 벽에  막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모님 댁에 딸아이를 맡기고 외출하던 일이 잦아지던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나 여고 동창생들이랑 여행 갔다 오려고."

 그래, 오늘은 그 날이다.  그녀가 여고 동창생들과 여행을 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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