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으로 도망치기
어제 저녁까지 우걱우걱, 이번 주 해야 할 과제를 끝내기 위해 하루를 48시간처럼 살았다. 그리고 다음 날, 9월 27일. 오전 8시에 출발하는 파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JFK 공항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비행이라 대중교통을 타고 가기엔 몸이 버거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새벽에 혼자 이동한다는 생각이 겁을 키웠다. 결국 택시를 타기로 했다. 일찍 일어나 밥부터 챙겨 먹고, 우버를 불렀다. 나는 웬만하면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할 때 꼭 밥을 먹는 편이다. 특히 여행을 떠나는 날은 체력을 충전한다는 핑계로라도 뭐라도 주워 먹고 나간다. 배가 든든해야 이동하기에 편하니까.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편했다.
꼭두새벽이라 밖은 어두컴컴했고, 만약 걸어서 지하철역까지 갔다면 그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 그날만큼은 편안함을 돈으로 샀다. 창밖으로는 집들이 낮게 엎드린 동네의 윤곽만 흐릿하게 지나갔다. ‘감상’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어둡긴 했다.
25분쯤 달렸을까. 카드로 결제된 금액은 원화로 약 8만 5천 원. 전혀 아름답지 않은 숫자였다. 순간 아깝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건 오늘 내 안전을 지켜준 목숨값이라고. 공항 가는 택시비는 시간대와 요일에 따라 천차만별이더니, 하필 그날은 유독 비싼 날이었다. 혼자 타고 가는 택시라 더 아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그 값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해 더 크게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웬일로 물을 챙기지 못해 편의점 같은 곳에서 생수 한 병을 집었는데, 가격이 6,363원이었다. 우리가 아는 그 ‘삼다수 500ml’같은 한 병이. 어이없을 정도를 넘어 그냥 웃음이 나왔다. ‘공항 물은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사 보니 체감이 달랐다. 그날 이후 나는 공항에 갈 때 물통이라도 꼭 챙기는 사람이 됐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화장실 앞 정수대에서 물을 채우는 습관도 생겼다. 비싼 물 한 병이 내 생활을 바꿨다.
나는 여유롭게 탑승구로 걸어가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유럽여행은 언니, 동생과 함께하는 일정이었다. 중심은 이탈리아. 내가 뉴욕에 있는 동안 유럽으로 넘어가는 게, 한국에서 셋이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 ‘이번 기회에 가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언니가 세븐틴이 나온 ‘나나투어’를 본 뒤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 했던 영향도 컸다. 여행을 결심하게 만드는 건 늘 거창한 이유보다 사소한 설렘이다.
우리는 파리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다음 로마로 넘어가기로 했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비행은 약 7시간. 한국에서 파리로 가는 14시간 반에 비하면, 내 몸은 이 편을 더 선호했다. 나는 14시간 반을 견딜 여력이 별로 없다.
이륙하자마자 기내식이 나왔다. 토마토 브루스케타 소스가 들어간 모차렐라 마니코티. 나는 대충 먹고, 에어 목베개에 바람을 슝슝 넣어 목에 걸었다. 아이패드에 저장해 둔 드라마와 예능, 영화들을 재생하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체구가 작은 편이라 이코노미 좌석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 항공기라 그런지, 좌석 간격이 한국보다 약간 넓게 느껴졌다.
한바탕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토이스토리에 나올 법한 동글동글한 구름들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도 아름다운 풍경은 분명했다. ‘지금 내가 진짜로 유럽으로 가고 있구나.’ 그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파리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언니와 동생은 이미 도착해 에펠탑도 보고, 긴 비행 끝에 호텔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언니는 내가 숙소에 도착하는 걸 보고 자려고 기다리다가, 너무 피곤해서 알람까지 맞춰두고 먼저 잠들었다고 했다.
나는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들고 애착 가방인 키르시 검정 백팩을 멘 채 샤를 드골 공항을 나섰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택시는 고정 요금이라고 언니가 미리 알려줘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문제는, 내가 파리 현금을 준비해 두지 못했다는 거였다. 언니는 내가 택시로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내려와, 돈을 쥐여줬다.
호텔로 들어가는 마지막 길목에서 언니가 서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도 반가웠다. 함께 방으로 올라가니 동생은 나를 기다리다 잠에 못 이겨 그대로 뻗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얼른 씻었다. 그리고 언니가 잠든 침대 옆에 나란히 누웠다. 머리 방향을 서로 반대로 하고, 아이패드로 영상을 보다가 다시 언니랑 머리 방향을 맞춰 눕고 천천히 잠이 들었다.
기대되는 내일.
그날 밤, 우리 삼 남매는 함께 파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