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 "함께"의 깨달음 2

(13) 카놀리 한입, 노스엔드에서

by 윤예진

오늘은 보스턴의 노스엔드로 간다.

‘리틀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동네. 오래된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미로처럼 붙어 있는 곳이다.



새벽부터 눈이 조금 내렸는지 하늘은 어두운 빛이었다. 골목 오른편엔 차들이 빼곡히 주차돼 있었고, 그 때문에 거리는 더 좁아 보였다. 바람이 건물 사이를 훑고 지나가면, 아직 못다 내린 눈들도 바람에 소용돌이 되어 날렸다. 우리는 후드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고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올드 노스 교회를 지나 베이커리 카페인 ‘Mike’s Pastry’에 도착했다. 유명세를 증명하듯 안은 사람으로 꽉 찼다. 진열장엔 디저트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 위엔 토핑이 과할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치즈케이크는 치즈보다 토핑의 존재감이 먼저 보였다.



우리는 대표 메뉴인 카놀리를 골랐다. 피스타치오 맛.

카놀리를 처음 먹은 건 지난 이탈리아에서의 삼 남매 여행이었다. 베네치아 골목을 걷다, 하나 사서 베어 물었을 때의 그 ‘과자 같은 식감 속의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필링’의 기억. 그때의 맛을 떠올리며 미국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의 맛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줄이 길어 우리는 포장해 밖으로 나와 먹었다.

입에 넣자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왔다. 이탈리아에서 먹던 것보다 더 달고, 더 ‘만든 맛’에 가까웠다. 프레시함 대신 확실한 설탕의 힘이 있었다. 그래도 그걸로 충분했다. 맛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기억이 연결됐기 때문이다. “우리 그때 베네치아에서…” 동생과 말이 자연스럽게 이탈리아로 흘러갔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 보스턴 퍼블릭 마켓을 지나, 시청 쪽으로 이동했다. ‘BOSTON’ 사인 앞에서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여행에서 이런 사진은 결국 남는다. 꼭 어떤 작품처럼 잘 찍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로.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를 지나고,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 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스턴 커먼으로 들어갔다.

보스턴의 센트럴파크라고 불리는 곳. 눈이 쌓이니 공원 전체가 영화 세트처럼 보였다. 스케이트장은 아이들의 소리와 음악으로 가득했고,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모두 장갑 낀 손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어느 도시든 겨울이 오면 공원 한복판에 스케이트장을 만든다. 뉴욕에서도 그랬고, 보스턴에서도 그랬다. 겨울이 오면 사람들은 빙판 위에서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야외 놀이를 하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보스턴 커먼은 개방감이 있었다.

나무가 빽빽한 대신, 일정한 간격으로 얇은 나무들이 서 있어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겨울이라 가지는 앙상했고, 그 위로 눈이 얹혀 나무가 더 가늘어 보였다. 지난 새벽 다 내리지 못한 눈이 조금씩 흩날려 우리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The Embrace’ 앞에 섰다.

서로를 끌어안은 팔을 조각으로 만든 작품. 우리는 그 앞에서 똑같은 포즈를 따라 했다. 사실 별 의미 없는 장난일 수도 있는데, 그날의 우리에게는 작은 약속 같았다. 잘 다독이자. 싸우지 말자. 남은 여행도 같이 잘 가보자.


오늘은 “별거 안 한 것 같은데” 체력이 빠르게 줄었다.

눈 맞으며 걷는 건 생각보다 힘이 든다. 추위가 몸을 움츠리게 만들고, 발밑은 미끄럽고, 마치 계속 긴장한 채 걷는 느낌이다. 카페를 찾으려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동생이 말했다.


“누나 제발…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가자.”



우리는 바로 근처 ‘George Howell Coffee’로 들어갔다. 앉을자리가 있는 곳이면 됐다. 따뜻한 공간에 앉은 채, 창밖으로는 눈이 계속 내렸고, 둘 다 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주문했다. 추운 날에도 얼죽아. 몸은 떨리는데, 습관은 고집을 부린다. 따뜻한 공간에서 시원한 라떼를 마시고, 창밖을 보며 잠깐의 정지를 할 수 있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우리는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또 훠궈였다. 그저께 갔던 곳이 숙소에서 걸어서 6분. “안 갈 이유가 없다”는 말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우리는 뜨거운 국물에 고기를 담그고, 채소를 익히고, 기름과 땅콩소스를 섞어 소스를 만들었다. 겨울의 피로는 이런 음식 앞에서 조금 조용해진다.


그날 밤, 나는 슬쩍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미국의 겨울—특히 동부의 겨울—에 조금씩 질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워싱턴에서는 눈 때문에 계획했던 곳을 많이 못 갔고, 그 아쉬움을 품은 채 보스턴으로 왔다. 그런데 보스턴에서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여행은 ‘많이 보면 이득’이 아니라, ‘지치지 않는 속도’가 중요하다는 걸 뒤늦게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를 허투루 두고 싶지 않았다. 지치고, 돈이 아깝고, 일정이 길게 느껴지는 순간에도—이 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걸었다. 눈 내리는 노스엔드의 골목을, 보스턴 커먼의 하얀 공원을, 그리고 훠궈집으로 가는 짧은 길까지.


워싱턴과 보스턴에서의 시간은,

언니와 함께했던 힘든 뉴욕 10일 이후에 몸이 요구한 ‘숨 고르기’ 같았다. 관광이라기보다, 여행을 계속할 힘을 비축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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